우리 지성계와 문화 전반을 질타하는 <번역은 반역인가>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대학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는 교수이자 번역가인 박상익씨는 대학 시절 지금은 문을 닫은 ‘종로서적’에서 영국 작가 웰스가 쓴 원서와 당시 어느 명문대학에서 강의하던 저명한 언론인의 번역서를 함께 샀다. 일개 대학생이 더듬더듬 사전을 찾으며 읽는데도 숱한 오역과 비문이 발견되는 걸 보고 놀라고 만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탈리아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교수가 번역한 단테의 <신곡>을 고전독서모임에서 읽을 땐 “명사들의 마각”을 보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에 띄는 무수한 오역들 때문에 도저히 내용 파악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번역은 반역인가>(박상익 지음, 푸른역사 펴냄)는 우리 번역문화에 대한 에세이이자, 통렬한 고발장이다. 지은이는 해박한 인문학 지식과 구수한 입담으로 조근조근 번역에 관련된 이야기를 펼치다가, 어느새 사하라사막 같은 우리 번역의 현실에 펀치를 날린다. 그러나 그 펀치는 번역자들을 넘어서 우리 학계와 문화 풍토 전반을 향한다. 우리의 지성은 얻어맞아야 할 데가 너무 많다.
엘리트 지식인들이 조악한 번역서를 내는 이유를 지은이는 두 가지로 명쾌하게 요약한다. 첫째는 교수 본인이 불성실하게 번역한 경우, 둘째는 대학원생들에게 적당히 나눠 번역을 맡긴 뒤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낸 경우. 적어도 번역 분야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고 한다. 지은이가 인용한 표정훈씨의 글을 보자. “여기 소개하는 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의 학과 또는 교수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과 <논리학>을 <권리의 철학>과 <논리의 과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물리학>으로, 졸라의 <제르미날>을 <저미날>로 번역한 것을 그렇다 치고….”
이것은 번역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지성사 전반의 문제다. 번역은 그 사회의 미래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엄청난 번역 작업을 통해 서양의 문화를 빨아들였다. 우리가 쓰고 있는 서양 철학 용어들은 대부분 일본 근대 지식인들에게 빚지고 있다. 중세 이슬람은 고대 그리스 서적들을 번역하여 전성기를 누렸고, 이 유산은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으로 흘러들었다. 번역이 전제되지 않는 지적 활동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동서양의 고전 중에 제대로 번역된 책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번역은 교수들의 연구실적에도 포함되지 않을 만큼 값어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번역자들의 작업은 그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보수가 적다. ‘연구번역’이 석·박사 학위 논문으로 인정되는 것이 외국 대학들의 관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어림도 없다. 하다못해 국어사전마저도 오류가 수두룩하고, 예산 부족 문제로 수정본까지 뒤로 밀린다.
그래서 지은이는 “번역은 반역인가?”라고 묻는다. 번역의 본질적인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이 말은 번역의 가능성을 가린다.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이야말로 그 사회의 지적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다시 한 번 밝혀둔다.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