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연인·가족들에 제안하는 문화 프로그램…온갖 매체를 동원해 신나게 놀아보자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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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손꼽아 기다렸을지라도 특별한 계획 없이 보내기 일쑤다. 더러는 연휴라 해서 색다른 일정을 보낼 경제적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마음먹기 나름이다. <스티븐 킹 전집>이나 <장정일 삼국지>를 독파하겠다는 다짐만 해도 최장 9일이나 된다는 설 연휴가 짧게 느껴질 게 틀림없다. 짬짬이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본다면 재미는 두배가 될 수 있다. 그러고도 하루쯤 여유가 있다면 만화방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혼자인 사람, 연인들, 가족들이 넉넉하게 지낼 만한 문화생활을 제안한다. 세 부류로 나누었지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 문화 제안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크로스오버가 가능하다. 편집자
나홀로씨, 혼자라서 바뻐요
나홀로씨는 외롭지 않다. 오히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욱 바쁘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혼자놀기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에게 연휴는 놀이 시간이 확장되는 때일 뿐이다. 겨우 단편소설이나 짧은 여행기나 읽던 데서 두툼한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고전의 향기를 흠뻑 느낄 수도 있다. 넉넉한 마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죠리퐁’이나 캡슐약 ‘콘택600’ 내용물의 개수를 셀 겨를이 없다. 그리고 바깥바람을 쐬고 싶을 때 디지털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나가면 순식간에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다.
언제나 나홀로씨는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그를 즐겁게 하는 매체들이 온갖 재미와 웃음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텔레비전 영화로 놓친 감동을 뒤늦게 맛보거나 특집 다큐멘터리로 지적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기본이다. 명절 기념으로 쌈짓돈을 풀어 휴대전화 겸용 단말기로 시험방송 중인 ‘내 손안의 TV’를 즐길 수도 있다. 아직은 방송 품질을 점검하는 시험방송 단계지만 달리는 자동차·지하철 안에서 색다른 재미를 체험하기에 그만이다. 게다가 비디오 3개, 오디오 6개 등 모두 9개 채널을 무료로 즐길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나홀로씨는 바깥 공기를 가까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의 눈과 귀를 붙드는 콘텐츠가 여기저기 넘쳐나지 않는가. 미니홈피 관리에 들어가면 서너 시간 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설을 맞아 일촌들 방명록에 한줄 인사라도 남기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게 뻔하다. 사진첩을 둘러보며 근황을 파악해 관심을 보이려면 시간은 더욱 소모될 것이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사이버 문화의 흐름을 단박에 파악하려면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나 ‘도깨비뉴스’(www.dkbnews.com) 등에서 잠시라도 놀지 않을 수 없다.
갈수록 온몸을 휘감아 아래로 흐르는 살들을 연휴 동안에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놀면서 다이어트하는 계획을 세울 수는 있다. 비디오게임이나 온라인게임을 즐기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 된다. 실제로 일본 소니는 <아이토이: 플레이>를 30분간 이용하면 60kcal(자전거 타기 4.8km 운동효과)의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최근에는 몸짱이 전문 트레이너로 등장해 다이어트를 지도하는 <마야>라는 X박스 게임이 나오기도 했다.
나홀로씨를 위한 문화제안
만화: <불의 검>(김혜린 지음, 대원CI 펴냄) 1992년 순정만화 잡지에서 시작해 지난 연말 마지막 권(12권)을 발간했다. 여성 취향 대하 서사 순정물의 금자탑. <다모>같이 서사극과 로맨스의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독자층을 넓혔다. 남성 독자들에게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책: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다나베 세이코 지음, 작가정신 펴냄) 올해 77살인 할머니 작가 다나베 세이코의 반짝이는 연애소설집이다. 연애의 달콤함과 냉혹함을 섬세한 문체로 그렸다. 특히 여성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 새로운 연애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음반: 파블로 지글러의 <바호 세로>(Good) 탱고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피아니스트였던 파블로 지글러는 탱고를 클래식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기존 작품의 편곡과 새로운 작품의 창작을 시도한 실험적인 작품이다. 탱고 음악의 정체성을 유지한 절제 연주가 빛을 낸다.
영화: <텐 미니츠-첼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마이크 피기스, 클레어 드니 등 감독) 거장 감독들의 옴니버스 영화. 시간이라는 주제로 모두 15명의 감독이 참여했다. 1편 ‘트럼펫’은 2년 전에 선보였다. 첼로의 선율로 각 단편이 이어지며 감동과 여운이 오래 지속된다.
단둘이씨, 분위기 있는 공간을 찾아
연휴 때만 되면 가슴팍이 시렸던 단둘이씨. 항상 누군가를 옆에 끼고 다니는 게 일상인데 명절에는 아무도 곁에 있지 않았다. 그에겐 긴 시간을 보낼 특별한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아마 지난해 스키 캠프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올해도 어김없이 나홀로씨처럼 지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한눈에 쏙 들어온 그 사람의 연습 파트너가 됐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돌아올 때 그의 자동차 조수석은 빈자리가 아니었다. 단둘이씨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 산골짜기에 있는 카페 예스터데이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단둘이씨는 꿀맛 같은 연휴를 기다린다. 그동안 만족할 수 없었던 드라이브 코스를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서울의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순환도로 혹은 경기도 과천 경마공원 옆길을 둘러싸고 국립현대미술관까지 어어진 ‘경마장 가는 길’을 살포시 뛰어넘는 것이다. 눈을 만끽하고 싶다면 기차를 타는 게 좋다. 오는 2월27일까지 운행하는 환상선 눈꽃열차에 오르면 된다. 환상선은 영동선과 태백선을 돌아간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지만 관광객들은 눈 쌓인 영월~사북 구간의 설경이 가히 환상적이라서 붙인 이름이라 여긴다.
요즘 단둘이씨는 맥주 마시는 걸 취미생활로 하고 있다. 맥주 마시고 캐나다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는 것이다. 캐나다 관광청(www.travelcanada.or.kr)은 오는 3월15일까지 오비 카스와 함께 ‘즐거운 톡! 파티 인 캐나다’ 이벤트를 펼쳐 모두 5쌍에게 캐나다 여행권을 준다. 여기에서 기회를 잡으면 신혼 여행비를 아낄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틈틈이 카스 큐팩 세트를 구입해 웹사이트에 일련번호를 입력하고 있다. 그게 미래 투자라면 연휴를 위한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다. 새벽 비행기로 떠나는 밤도깨비 일본 여행이 있기 때문이다.
단둘이씨가 분위기를 만끽할 만한 도시의 공간도 얼마든지 있다. 모처럼 여유를 갖고 도시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수두룩하다. 워커힐호텔 16층에 있는 ‘스타라이트’에 가면 라이브 재즈를 들으며 차량 불빛이 연출하는 환상적인 장면을 즐길 수 있다. 서울 중심가에서도 화려한 야경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엔 시청 앞 프라자호텔 22층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토파즈’가 적격이다. 연인석도 따로 마련돼 있다. 혼자가 아닌 단둘이씨. 무엇을 해도 즐거울 게 틀림없다. 그에게 설 연휴 계획의 으뜸은 고향집에 연인을 소개하는 것이리라.
단둘이씨를 위한 문화제안
만화: 일지매(고우영 지음, 애니북스 펴냄) 30여년 전에 신문에 연재한 만화를 무삭제 완전판 전 8권으로 복간했다. 선 굵은 사극과 해학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준다. 연재 만화의 힘이 듬뿍 실린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고전의 묵은 맛이 제대로 살아 있다.
책: <스티븐 킹 전집>(스티븐 킹 지음, 황금가지 펴냄) 연휴의 밤을 오싹하게 보내기에 좋은 스릴러 소설. 미국 스릴러 소설의 정점에 있는 작가의 심오한 도덕적 진실을 만난다. 그가 왜 토머스 하디, J. R. R. 톨킨, 셰익스피어의 전통을 잇는 작가라 평가받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음반: 케렌 앤의 (EMI) ‘제2의 프랑수아즈 아르디’로 불리우는 프렌치 팝·모던 포크의 절대적 아이콘 케렌 앤의 첫 영어 음반. 국내에서 광고와 영화 배경음악으로 사랑을 받았던 음반으로 감성적인 멜로디와 애잔한 보컬이 느낌을 팍팍 안겨준다.
영화: <클로저>(마이크 니콜스 감독, 줄리아 로버츠, 주드 로 출연) 첫눈에 반한 운명적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는 것일까. 스트립 댄서 줄리아 로버츠가 신문 부고담당 기자 주드 로를 만나 격정적 사랑에 빠진다. 대형사고로 다가왔던 사랑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신나네씨, 아이들에게 문화체험을
신나네씨는 명절만 되면 고달프다. 맞벌이를 하는 탓에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첫째와 일곱살배기 둘째에게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겨우 아침 한끼 해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슈퍼 부모’가 되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을 내도 아이들의 요구를 모두 충족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가나 명절 연휴만 되면 아이들의 길잡이 구실을 해야 한다. 이때 소홀하면 적어도 6개월 이상 아이들의 등쌀에 시달릴 게 뻔하다. 더구나 이번 설 연휴는 최장 9일을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지 않은가.
시간이 많은 만큼 머리를 복잡하게 굴려야 한다. 빠듯한 형편에 씀씀이가 넉넉한 나들이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일단 공짜를 즐기기로 했다. 2월8일부터 10일까지 전국의 고궁과 능·원이 무료로 개방된다는 뉴스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연휴 첫날은 친가가 있는 전남 목포에 가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관람하기로 했다. 그리고 설날 저녁엔 충남 금산의 외가에 가기로 했다. 다음날 ‘칠백의총’(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을 둘러보면 된다. 10일 오후엔 한복을 입고 창덕궁에 무료 입장하고 싶지만 시간이 빠듯할 듯하다.
모처럼 쉬게 된 토요일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유년 시절의 문화 경험이 소중한 자산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공연이나 전시회 한번 가지 못했다. 모처럼 휴일에 어린이 공연에 갔다가 둘째 녀석이 지루함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질러 망신을 당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와 둘째가 모두 만족할 만한 공연이나 전시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어린이 뮤지컬 <미피의 남극탐험>(2월27일까지, 과천시민회관 대극장)과 <친구들이 마법의 성에 갇혔어>(2월27일까지, 서울 대학로 상상 화이트 소극장)가 눈에 띄었다.
무엇이 좋을까를 생각하는 신나네씨.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일거양득, 동가홍상,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넉넉하게 경기도 과천에 다녀오기로 했다. 제비울미술관의 ‘유쾌한 상상 작업실 체험전’을 보고 공연을 보면 괜찮은 일정이 될 것 같았다. 천재 수학자 딸의 진실을 웃음과 희망으로 풀어낸 연극 <프루프>(2월4일~3월13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같은 공연은 꿈도 꾸지 않은 지 오래다. 신나네씨가 가족을 떠나 홀로 있거나 부부가 단둘이 있을 때 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명절 연휴는 밀린 숙제를 하는 기간일 뿐이다.
신나네씨를 위한 문화제안
만화: <남쪽손님> <빗장열기>(오영진 지음, 길찾기 펴냄) 한국전력 도서전력팀원으로 경수로 공사를 위해 북한에 파견됐던 작가의 548일 북한 체류기. 공사 현장에서 경험한 북한 주민의 일상에 관한 관찰자의 이야기. 북한 체제가 아닌, 북한 사람을 풍부한 정보로 읽을 수 있다.
책: <장정일 삼국지>(장정일 지음, 김영사 펴냄) 남녀노소를 막론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삼국지>가 한족에 의한 한족을 위한 한족의 선전물 또는 강령일 수도 있다”는 비판적 시각으로 화이론적 차별을 주의 깊게 해체한다. 이런 차별성을 추적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음반: 양방언의 (씨엔엘뮤직) 동서양의 정서를 넘나드는 뮤지션 양방언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음악세계를 보여주며 국악기를 적절하게 가미해 한국적인 정취도 물씬 풍긴다. 작곡과 편곡, 연주와 녹음 등의 전 과정을 거의 홀로 작업했다.
영화: <말아톤>(정윤철 감독, 조승우·김미숙 출연) 웃음과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고도 감동을 준다. 배우들의 연기와 탄탄한 연출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 속 이야기가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장애인 영화에 대한 편견을 감동으로 깨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