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무대미술은 공연의 어엿한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미술가들은 삶과 예술의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로 퍼포먼스와 해프닝 등의 연극적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새로운 매체와 설치 방식으로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일도 흔하다. 하지만 국내의 관객들이 무대미술의 ‘주역’으로 받아들인 것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으로 무대미술의 진가를 확인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무대미술이 독창적 기법으로 연기와 대본을 압도하는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최근 국내 공연시장은 급성장 추세에 있다. 지난 1995년 이후 해마다 15% 이상 시장이 확대돼 올해만 해도 2천억원대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공연시장의 성장세와 맞물려 무대미술의 구실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연극이나 뮤지컬과 미술이 폭넓게 만나면서 진정한 종합예술의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뮤지컬에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해외에서 갈고닦은 기량을 국내에 풀어놓을 인력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무대미술은 예술적 성취를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무대미술에 관련된 인적 인프라가 확충되고 시장이 커지면서 무대미술의 중요성은 높아졌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탓이다. 연극평론가 정재왈씨는 국내의 무대미술은 여전히 모색기에 있다고 말한다. “국내 무대미술가들이 국제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으며 독립적 활동을 보장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동안 소극장 위주의 공연에서 무대미술가들이 진가를 발휘하기 힘들었지만 이젠 무대가 다양해지면서 활동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는 무대미술의 두드러진 성취를 보여주었다. 2세대 무대미술가로 도제식 훈련을 받고 전문성을 가다듬은 박동우씨는 다양한 기술적 실험으로 정평이 났다. 그는 <명성황후>에서 공중전투 장면과 경사무대 등 화려한 테크닉을 보여주었고 <몽유도원도>에서 공중으로 범선을 올려 <오페라의 유령>에 버금가는 효과를 냈다. 무대미술가 이태섭씨도 연극 <광해유감>에서 천장을 흰천으로 뒤덮고 개방형의 트러스트 무대를 만드는 등 실험적 무대미학을 선보였다.

현재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무대미술가들은 3세대쯤에 속한다. 하지만 해외에서 전문성을 갈고닦은 ‘젊은 피’들이 아이디어를 풀어놓을 공간이 너무나 좁다. 무대미술의 진수를 경험한 관객들은 더욱 과감한 스펙터클을 기대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열악한 재정에 짧은 공연 일정을 생각하면 예술적 성취는 공염불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한국적 토양에서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는 독창성이다. 그것이 제대로 받쳐준다면 뮤지컬 <명성황후>처럼 국내외를 손쉽게 넘나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