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탄생, 그 치밀한 배경]
▣ 김종엽/ 한신대 교수 · 사회학
‘전래동화’라는 말이 있다. 이 말만큼 동화(fairy tale)에 대한 오해를 깊게 하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동화는 전래된 것이 아니다. 구비 전승되어 끊임없는 변형을 거친 적층적인 이야기인 민담(folk tale)과 달리, 동화는 특정한 작가가 창작한 것이다. 물론 동화작가가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지 않고 전승된 민담을 가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전승에 대한 동화작가의 개입은 대부분 매우 철저하고 의도적이며 텍스트로 확립된다는 점에서 구비 전승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띤다.
그렇다면 동화는 언제 탄생한 것일까? 늘 그렇듯이 기원의 확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없는 경우는 없지만, 샤를 페로(1628∼1703)의 <교훈을 곁들인 옛이야기>(1697)가 동화의 역사에서 첫자리를 차지한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동화집엔 8편의 동화가 실려 있는데, <빨간 두건 아가씨>(그림형제의 판본의 제목인 ‘빨간 모자’로 더 잘 알려진 이야기), <상드리옹 혹은 유리구두>(‘신데렐라’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야기), <장화 신은 고양이>,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요정들>, <푸른 수염>, <고수머리 리케>, <엄지동자>가 그것이다. 그림형제나 안데르센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동화 가운데 몇편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페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부르주아 출신으로 루이 14세 궁정의 법복 귀족이었으며, 시인이었고 문예학자였다. 그는 공직에서 은퇴한 뒤 1790년대 초부터 민담을 재구성한 이야기들을 출간하기 시작했는데, 많은 동화작가들이 그렇듯이 그의 동화 쓰기에는 개인적인 동기가 작용했다. 페로는 44살라는 나이에 19살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의 아내는 3남1녀를 두고는 결혼 6년 만에 죽고 만다. 그로 인해 페로는 자녀의 양육과 교육을 직접 챙겨야 했다. 그의 동화는 일차적으로 그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그 자신의 시대와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각광받게 된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필립 아리에스가 <아동의 탄생>에서 보여주었듯이 어린이가 하나의 생애주기로 자리잡던 시기였고, 그만큼 어린이 훈육이 사회적 관심거리가 되던 때였다. 페로의 동화는 그런 시대의 요구에 더해 민담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는 너무 조야한 것으로 생각한 그 시대 지배층의 미적 감수성 그리고 부르주아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이 점은 그의 동화를 조금 들여다보면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장화 신은 고양이>를 한번 보자. 이 이야기는 재주 많은 고양이를 비서로 둔 사람의 출세담인데, 여기서 페로가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은 고양이다. 고양이는 마치 법복 귀족인 부르주아처럼 주인(귀족)을 위해 봉사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는 종내 귀족으로부터 지배자의 자리를 찬탈할 부르주아의 자신감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모험적이며 교활한 간계를 꾸밀 능력을 가진 것은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페로는 남자어린이를 다룬 동화를 통해서 부르주아 남성의 가치관을 가르친다. 하지만 여자어린이가 주인공인 동화, 예컨대 <상드리옹>이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그리고 <빨간 두건 아가씨> 등에서 페로가 강조하는 것은 정숙함, 순종과 같은 가치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로의 동화는 성차별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페로의 동화집이 그렇듯이, 동화는 그 기원점에서부터 항상 동화작가가 내면화하고 있는 성적·계급적·민족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었다. 동화의 역사에 페로의 다음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그림형제의 동화는 후진국 독일 부르주아의 나라 만들기(nation-building) 작업의 일환이었으며, 안데르센의 동화는 개인적 콤플렉스와 덴마크 지배층의 이데올로기간의 기묘한 융합의 산물이었다. 이런 현상은 동화의 역사 전체에서 나타났다. 그래서 동화의 스펙트럼은 존재하는 모든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이데올로기로부터 면제된 순결한 동화를 찾기보다는 모든 동화를 논쟁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