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1번지’의 젊은 연극 <나체질주자 수사본부>… 탑골공원의 돈키호테가 벌이는 웃지 못할 촌극
장은수/ 연극평론가 · 한국외대 교수
나체질주자가 떴다는 소문 따라 소극장 ‘혜화동 1번지’를 찾았다. 여느 때보다 훨씬 넓어진 무대, 대신 객석은 한 구석으로 오그라들어 30명도 채 앉기 힘들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성 없기는 여전했다. 그래서인지 꽉 찬 객석, 연극의 시작은 가족적 멘트가 나오는 객석에서 이미 시작된다. 옹색하게 끼어앉은 옆자리의 한 친구가 “이래가지고 극장 운영이 될까?” 하자, 그 옆의 친구는 바로 코앞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를 보고 “야, 저 배우 진짜 지저분하다!” 감탄하며 코를 움켜쥔다.
6인6색 페스티벌의 마지막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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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골공원을 무대로 삼은 <나체질주자 수사본부>는 일탈적 스트리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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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혜화동 1번지 3기 동인들의 페스티벌 ‘니체의 배꼽전’의 마지막 주자인 이해제 작·연출로 극단 신시루 만화경이 무대에 올린 <나체질주자 수사본부>는 그렇게 리얼하게 시작했다. 2시간 동안 펼쳐진 우리 시대 돈키호테의 눈물나도록 웃기는 이야기 속에서, 객석을 줄여서라도 무대를 제대로 만들려 애쓰는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솔한 연극을 만날 수 있었다.
10년 전 혜화동 1번지가 처음 출범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돈키호테 같은 짓이라고 했다. 옹색한 무대와 그보다 더 작고 옹색한 객석에서 뭐 그리 대단한 작품이 나오겠느냐고. 그것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동안 2기 5명, 3기 6명의 연출가들이 모여 동인의 색다른 작업을 페스티벌 형태로 공연해온 혜화동 1번지는 이제 ‘연극 실험실 1번지’란 타이틀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젊은 실험의 장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당시 ‘젊은 연극’의 기치를 내걸고 개관 작업에 참여했던 이들은 올해 국립극장 주인이 된 이윤택 연출을 비롯해 김아라, 이병훈, 채승훈 등 오늘날 우리 연극계를 이끄는 대표주자가 되어 있다. 그들의 후속 주자들은 2기 동인 첫 작업인 <육두육감>을 시작으로 혜화동 1번지의 페스티벌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러고 보니 이해제를 비롯해 양정웅, 박장렬, 송형종, 김낙형 등 30대 차세대 주자들이 모인 3기 동인의 작업도 어느덧 4년째 접어들어 이젠 완연히 물이 올랐다. 지난 3월부터 막을 올린 6인 6색의 연극 페스티벌 ‘니체의 배꼽’은 그들이 도전적으로 내놓은 7번째 페스티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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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실험실 '혜화동 1번지'는 3기 페스티벌에 '웃음'을 화두로 삼아 6편의 작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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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페스티벌은 모두 창작극으로 구성됐고 그 중 네 작품을 연출가가 직접 써서 무대에 올린다는 점도 특색 있다. ‘니체의 배꼽’은 애초에 자연스런 대사와 시적인 지문으로 주목받아온 작가가 만든 무대인 만큼 감칠맛 나는 대사가 살아 있다. 3기 동인들은 이번 페스티벌의 화두로 ‘웃음’을 선택했다. 니체는 가장 괴로운 동물이 웃음을 발명했다고 했다. 괴로운 나머지 웃음을 만들어냈다니 가히 만물의 영장다운 생존전략이다.
<나체질주자 수사본부>는 스트리킹이 한창 유행하던 70년대에 실제로 설치됐던 긴급수사기관에서 힌트를 얻은 얘기다. 벗는 게 다반사가 돼버린 요즘은 그 충격 효과가 줄었지만, 아직도 휴지통이나 돋보기 같은 신문 가십난에는 이 시대의 돈키호테들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들이 발가벗고 거리 한복판을 뛰게 만드는 요인은 5·18 광주사태나 노통 탄핵 반대처럼 대단한 이슈들이 아니다. 70년대 이유 없는 반항으로 한남동 대로를 질주하던 장발 청년이 있었다면, 근래에는 성당 미사 도중에 낙태 반대를 외치며 달린 40대 외판원도 있고(<경향신문> 1994년 5월24일치 23면), 자신의 팔뚝에 히로뽕을 주사한 뒤 환각 상태에 빠져 스트리킹을 했다는 사채업자(<동아일보> 1997년 5월3일치 39면)도 있다.
알몸 ‘갑옷’ 알아줄 사람 없나
<나체질주자 수사본부>의 스트리킹 무대는 탑골공원이다. 한때 독립선언의 역사적 순간이 이루어졌던 탑골공원은 자본주의 현실에서 도태된 인간들의 게토로 전락한 지 오래다. 무대 한가운데 보수 공사용 보호망에 둘러싸여 흉물스럽게 서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 폐허 앞에서 그보다 더 흉물스럽고 처절한 주변부 인생의 만화경 무대가 펼쳐진다.
신용불량 금치산 선고를 받고 콩팥이라도 팔아 망가진 인생을 회복하려는 명품중독녀 미스 구찌, 박카스에 자기 몸을 덤으로 끼워 파는 덤핑매춘녀, 색소폰을 불며 화려했던 과거 속을 배회하는 개병대 용사, 오토바이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광화문 초판맨, 남산타워에서 일하다 고공공포증으로 실직한 통신기술자, 야바위꾼들에게 속는 줄 알면서도 외로움을 달래려 매일 돈을 내다주는 노인네들. 그런 밑바닥 인생들이 마지막 희망의 줄을 서는 공원 무료급식소는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비난의 대상이다. 형편없이 초라한 밥판을 받아들고 울분을 터뜨리는 노숙자들 앞에 풍선 든 나체질주자가 돈키호테처럼 나타난다.
나체질주자 귀갑은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되면 자랑스럽게 바바리를 벗고 알몸을 내보이며 ‘반찬개선문’을 독립선언문처럼 낭독한다. 자신을 홍경래 장군의 후손이라고, 그것도 외손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속에 장군의 갑옷을 입고 있다고 믿는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알몸을 험한 세상으로부터 단단히 보호해주고 있다는 그 갑옷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병든 딸의 약값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각사 탑과 노숙자, 나체질주자가 한자리에서 만나 장기자랑하듯 돌아가며 벌이는 웃지 못할 촌극은 ‘풍기문란 사범’을 소탕한다며 잠복 근무하던 양 반장과 오 형사의 등장으로 절정에 이른다. 칼과 총으로 서로를 위협하며 대치하던 긴장된 상황은 귀갑이 자기 머리에 대고 쏜 한발 총성으로 종식된다. 하지만 영웅은 죽지 않는 법. 자살미수로 살아난 귀갑은 죽음 대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다. 화약총탄에 맞아 반창고를 붙인 귀갑의 귀에 대고 미스 구찌는 다정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의 갑옷이 “너무 튄다”고.
<나체질주자 수사본부>는 비단 탑골공원으로 내몰린 노숙자나 일탈적인 스트리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 벗어젖혔을 때조차도 자신의 빛나는 진가를 알아주는 연인을, 친구를, 가족을, 사회를 갈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개성 있는 양 반장 최재섭과 김은희, 할머니 딕션이 자연스런 박성연의 연기가 돋보였고, 익살맞은 기공훈련 장면처럼 배우들의 호흡이 잘 어우러졌다. 공연의 백미는 정작 대단원 암전 뒤에 선사됐다. 그리스의 사티로스극처럼 공연 마지막에 덤으로 붙은 에필로그 무대는 진짜 리얼하게 분장한 전인권(오달수) 덕분에 모두 폭소를 참을 수 없었다. ‘빨간 풍선’의 시원스런 리듬 속에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객석은 모두 나체 질주자가 되어 함께 외쳤다. “우린 모두 외로워/ 황혼에 물들은 같은 시간 속에…. 왜?/ 외로워 같은 하늘 아래….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