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당신도 치명적 사랑을 꿈꾸는가 화가 프리다 칼로의 사랑을 그린 영화 <프리다>… 사랑에 목마른 예술가가 겪었던 고통의 흔적들
어떤 영화를 보든지 잘 조는 내가 프리다 칼로의 삶을 그린 영화 <프리다>(11월 중순 개봉)를 볼 때는 졸지 않았다. 멕시코 공부를 하는 직업의식의 발로였을까 연속극 스타일로 만든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프리다 역으로 나온 샐마 헤이엑이 말했다. 이 영화는 “전기(傳記)가 아니라, 한계를 모르는 사랑 이야기”라고. 전기영화(biopic)란 외형에 집착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사랑 이야기로만 봐달라는 것이다.
프리다의 한계를 모르는 사랑 이야기
영화의 큰 줄거리도 프리다의 남편인 벽화가이자 바람둥이 디에고의 애정행각과, 복수의 심정으로 이를 받아치는 프리다의 애정행각이다. 디에고는 자신에게 섹스는 “오줌 누는 것”만큼 자연스런 행위라고 변명했다. 때때로 그건 “형식적인 악수보다 못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전기를 보면 프리다가 미남인 일본 작가 이사무 노구치와 바람을 피우자, 이 작가를 권총으로 쏴죽이겠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디에고는 처제까지 건드리고, 프리다는 숨기지 않고 동성애를 즐긴다. 그에게도 길고 긴 남자 애인 리스트가 있다. 서로 가슴에 비수를 꽂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프리다는 디에고를 버릴 수 없었고, 디에고도 결국 프리다 곁으로 돌아온다. 정말 사랑 이야기로 끝났으면, 이 영화는 멜로물로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 테이머 감독은 욕심을 부린다. 멕시코의 혁명벽화운동이나 트로츠키가 끼어든 좌익정치가 등장하고, 넬슨 록펠러와 디에고가 벽화를 두고 싸우는 장면도 나온다. 문외한이 따라잡기에는 쉽지 않은 장면들이지만 다행히 영화의 원작이 된 헤이든 헤레라의 전기 <프리다>(민음사)나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의 전기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다빈치)가 번역돼 있으니, 이를 읽는다면 숨고르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술은 정치와 사랑에 범벅이 되고
디에고가 프리다에게 말한다. “나는 바깥 세계를 그리지만, 당신은 내면 가운데 존재하는 것을 그리잖아.” 영화는 프리다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교통사고, 잦은 통증, 임신과 사산, 자신의 동생과 바람을 피운 디에고에 절망하는 프리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내면세계 그리고 프리다가 그린 그림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차라리 1984년에 멕시코 감독 파울 레둑이 만든 영화 <프리다>가 내면적 심리세계를 묘사하는 데 훨씬 뛰어나다. 거의 대사가 나오지 않는 이 영화에서 레둑은 칼로의 퍼스낼리티를 주관적이지만 자유롭게 그려낸다. 마치 한편의 초상화처럼.
멕시코 연구자가 이 영화를 보면 ‘불행한 의식’에 빠진다. 단편적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할리우드식 역사기술은 사건들간의 고리를 끊어버려 역사를 비역사로 재생한다. 그 결과 격동의 1930년대가 드라마틱한 연애 스토리의 배경으로 밀려난다. 상당 부분이 멕시코의 벽화운동에 관련된 이야기지만, 실제 벽화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역사의 비역사화… 멕시코 정서 외면
언어 문제도 심각하다. 전형적인 멕시코적 스토리가 영어로 얼마나 잘 전달될 수 있을까 만약 <서편제>가 영어로 더빙되어 상영되었다고 생각해보자. 한국적 정서가 그대로 전달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익살맞고 짓궂은 멕시코의 구어 어법은 영어 대사로 전혀 살릴 수 없다.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프리다였다. 그가 “아이 로뷰 소 모치, 판손”(Ai loviu so moch, panzon·당신을 사랑해요, 배불뚝이 아저씨), “규 고 투 그링골란디아”(Gui go tu Gringolandia!·당신은 양키들 땅으로 가버려) 식으로 말할 때, 멕시코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 ‘판손’(panzon·뚱보), ‘핀체’(pinche·꼬맹이), ‘토르티야’(tortilla·옥수수 전병) 같은 말들은 그냥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는 시끌벅적한 술집에 마리아치 밴드가 나오고 다양한 라틴음악이 흐른다. <프리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음악이다.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골덴탈의 사운드트랙뿐 아니라 차벨라 바르가스, 카에타노 벨로조, 릴라 다운스의 뛰어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큰 기쁨이다.
“이토록 사랑해도 내 사랑이 부족한가”
전설적인 목소리의 차벨라 바르가스가 두 곡이나 부른다. 노년의 그가 유령처럼 분장하고 노래하는 <요로나>(울고 있는 여자)는 정말 압권이다. 프리다는 디에고와 헤어진 뒤 어느 술집에서 이 노래를 듣는다. 쓸쓸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노래는 프리다가 존경하던 레온 트로츠키가 암살자의 스키 창에 찔려 죽어가는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흘러간다. 이 노래만큼 외롭고 힘들었던 프리다의 인생과 그 쓰라린 심정을 잘 표현한 것이 있을까? 허스키 보이스의 차벨라는 인생의 황혼에서 고통과 갈망을 장중하게 표현한다.
“이토록 사랑하는데도, ‘요로나’?
이성형 | 중남미 정치학자 · 세종연구소 초빙연구위원 fernandorhee@hotmail.com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