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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옆 콩밭에도 역사의 숨결이… 비엔날레 저 너머, 우리 도자의 중요 유적을 한몸에 묻고 있는 경기도 광주를 가다
8월28일 오전 광주로 가는 길은 마음이 편했다. 새벽까지 내리던 궂은비 때문에 맘을 졸였던 터에 아침이 되자 청명한 하늘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게 비온 뒤 땅이 패고 흙이 뒤집힌 경우엔 유물이 더 잘 보인다”며 최건 관장은 반겼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분원이 있었던 광주는 마을 곳곳이 가마터다. “우리 전통 가마는 경사가 완만한, 사람 살기 좋은 산자락 기슭에 굴을 파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마터 자리에 마을이 들어앉아 보존에 애를 먹습니다.” 최 관장은 먼저 식당과 각종 상점이 즐비한 우산리로 안내했다.
천주교인들의 성지, 도자의 성지
우산리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천주교 천진암 대성당터는 100년 동안 성전을 건립한다는 계획으로 10여년 전부터 터를 닦아놓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친히 다녀간 곳으로 천주교인들에게는 성스러움의 의미가 더 각별해졌지만 도예인들에게도 이곳은 역시 도자의 성지나 마찬가지다. 15세기 전반기에 분원이 자리잡았던 이곳엔 조선 전기 유행했던 상감 백자를 비롯해 청자 조각이 출토됐다.
광주에 왕실 직영 도자 공장이 들어선 것은 이곳이 우수한 도자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췄고 한양과 가까운데다 좋은 흙이 풍부하고 무갑산·앵자봉 등 숲이 무성해 번목(가마를 때는 장작)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전국 139곳의 자기소 중에서 상품(上品)을 만든 곳은 경상도 상주에 2곳, 고령에 1곳, 경기도 광주에 1곳밖에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 도공이 많았던 광주는 특히 강이 가까워 완성품을 배에 실어 쉽게 궁궐에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분원은 가마를 벌여놓고 10년쯤 지나면 근처 나무가 고갈되기 때문에 새 숲을 찾아 10년 단위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18세기 들어 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강원도에서 땔감을 실어나르게 되면서 분원을 한곳에서 오랫동안 경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상상 초월하는 보존에 대한 무지
땔감 조달이 편리해지면서 분원이 최종 정착한 곳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이곳은 지금도 마을 이름이 ‘분원리’로 불리고 있다. 1752년부터 1883년 민영화 되기까지 130년 동안 왕실·관청 사기 공장이었던 이곳은 20세기 들어 왜사기가 유행하면서 그 많던 가마터들도 죄다 문을 닫았다. 1920년 학교가 세워진 뒤 현재 분원초등학교가 들어선 분원리 가마터는 2만평 일대에 백자·청화 백자 파편들이 묻혀 있다. 1996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당시 아시아 문명권 최고가인 824만달러에 팔린 ‘철화백자용문호’ 같은 명품들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분원초등학교 입구엔 파편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곳에 ‘사적비’를 세우고 혹 훼손될 것을 염려해 파란 비닐 장막을 덮어놓았다. 아무런 조치도 안 취한 것보다는 낫지만 마치 공사가 진행되는 듯한 인상을 주어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가마터의 중요성과 이 보존에 대한 무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2년 전 열린 제1회 도자기엑스포 때는 도자 역사의 ‘물증’을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끝에 광주시에선 100여곳 가마터 일대에서 도자기 조각 2천kg을 거둬들여 일부를 전시장에 놓았다가 거센 비난 끝에 다시 매립해버린 사건도 있었다. 분원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나무그늘 밑에는 사옹원 책임자들의 선정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죽 늘어서 있다. 사옹원 우두머리 장인인 도제조의 선정을 기리거나 번조관(불 때는 직책)을 칭찬하는 비석 들이다. 본래 이 비석들은 강가 ‘비석거리’에 서 있던 것을 팔당댐 건설을 계기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의 기록인 <분주원보등>을 보면 번조관을 비롯해 분원 경영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27명이고 사기장은 108명, 나머지 417명가량은 잡역에 동원됐다고 한다. 분원은 철저한 분업으로 운영됐기 때문에 분원 사기장 가운데는 평생토록 불만 때다 죽는 이도 있었고, 일생 동안 물레만 돌리던 사람도 있었다. 조선시대 문인 이하곤은 1709년 백자 묘지(당시 고위층들은 일생의 기록을 자기로 구워 관에 넣었음)를 주문·제작하기 위해 분원에 와서 20여일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이때 보고들은 것을 문집 <두타초>에 적어놓았는데 “산모롱이에 사는 요인(窯人)들은 오랜 부역에 괴롭다. 지난해엔 영남까지 가서 진주 백토를 실어왔다”며 도공들의 노역을 동정했다. 또 “흙은 솜보다 부드럽고 발로 물레 돌리니 저절로 돌아 잠깐 사이 1천여개 빚어낸다”고 기록해 당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엿보게 한다.
개발과 복원의 갈림길에서
현재 광주 일대 가마터는 보존 방안에 대한 연구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발굴하면 훼손은 순식간”이라며 조사는 하되 개발을 하지 말자는 쪽과 이를 복원해 사람들이 많이 느끼고 배우게 하자는 의견이 팽팽한 상황이다. 최소한의 개발을 원칙으로 한 ‘분원백자관’은 그 갈림길에 서 있는 시금석처럼 보였다.
광주=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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