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 여성들이 눈치보지 않고 털어놓은 이야기 모음 <언니네 방>… 성·관계·직장·가족·사회 문제에 부딪쳐 깨우친 지혜와 용기를 만난다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쯧쯧, 요즘 젊은 년들은….” 20∼30대 여자라면 어디서나 이런 소리를 듣고 다닌다. 도처가 지뢰밭이다. 음흉하게 쳐다보거나 다짜고짜 혼내거나 대놓고 무시한다. 가장 끔찍한 ‘대접’은 ‘딸 같아서’ 만지거나 ‘여자에게 기죽기 싫은’ 남자들이 ‘각종 시험대에 올리는’ 경우다. 그러면서 정작 ‘요즘 젊은 여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는 잘 모른다. 지뢰밭을 건너다 보니 젊은 여자들에게는 저마다 비밀이 생긴다.
특별하고 소중해서, 혹은 충격적이고 놀라워서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편견과 사심 없이 귀기울여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밀이 되는 이야기들”이다. 2000년 문을 연 인터넷 사이트 언니네(www.unninet.net)는 “여성들이 사이버 공간에 둥지를 틀어온 과정을 보여주는 산 역사”(‘정보트러스트 어워드 2005’ 수상 이유)라는 평가를 받는다. 언니네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에 털어놓은 이야기 중 지난 5년간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들이 책으로 묶였다.
언니네에서 가장 많이 추천받은 글들
‘내가 혼자가 아닌 그곳’이라는 부제가 붙은 <언니네 방>(갤리온 펴냄)은 글쓰기를 통한 치유와 분노, 카타르시스가 비벼져 있다. 저소득층으로 사는 단독 세대주라도 “35살 이하면서 결혼 안 한 사람은 대상이 아닌” 전세자금 대출의 ‘결혼지상주의 혹은 비혼여성 왕따주의’(필명 땐 ‘비혼 여자로 산다는 것’), 섹스할 때 늘 제멋대로고 헤어질 때마저 자기 발기부전되면 책임질 거냐며 징징대던 녀석이 나중에 섹스 불화의 책임을 “오로지 나의 피곤함”에 뒤집어씌우는 걸 보며 새삼 확인한 ‘남자들의 자기 합리화’(필명 레이 ‘섹스할 때 끝까지 넌 이기적이었지’), “나이 어린 여자가 회사 대표라고 명함을 내밀면 기분 나빠하고, 무조건 자기 밑에서 기어(?)주길 바라며, 접대를 받을 때에도 ‘바라는 게’ 훨씬 많아지는” ‘엿 같은 비즈니스의 세계’(필명 감자 ‘사업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성·관계·직장·가족·사회의 각종 문제에 몸으로 부딪혀 깨우친 지혜와 용기를 만날 수 있다.
필명 이스크라와 리찌는 ‘성적 모욕에 대처하는 법’을 전한다. 내용을 간추리자면 이렇다.
한 남자 동기와 후배들을 같이 만날 일이 있었다. 그는 내가 자기 우상이던 선배와 연애하다 헤어진 뒤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평범한 수다를 떨던 중 갑자기 나에게 “…좆까라, 씨발”이라고 말했다. 습관적으로 나온 욕설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나를 모욕하기 위해 뱉은 욕설이었다. 그러고는 능글맞게 내 반응을 보았다. 난 잠깐 당황했지만 그런 욕을 듣고만 있을 만큼 착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정말 미안하지만 말이야. 난 깔 좆이 없는데 어쩌지? 니 좆이나 까지.” 좌중은 박장대소했고 녀석의 얼굴색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할아버지 부장과 여자 과장, 그 외의 남자 대리들이 등장한 회의 장면. 남자 대리1이 “과장님 이번 본부 시상식 때 사회 보시죠. 여자가 봐야 분위기가 좋잖아요”(이런 행사 사회는 보통 대리가 본다)라고 제안한다. 여자 과장은 “싫다. 대리 일이니 대리가 하라”고 했다. 그때 할아버지 부장이 “과장은 안 돼” 이랬다. 일동 “네?” 하자, 부장은 “과장은 자지가 없어서 안 돼”라고 말했다. 모두 당황한 가운데 여자 과장이 받아쳤다. “어머, 부장님은 자지로 말하세요? 자지는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닌데요. 하기야 부장님은 힘이 달리니 자지 쓸 일도 없겠네요.”
성적 모욕 받으면 그대로 반사!
책에는 언니네의 ‘팁’도 붙여놓았다. 1. 절대 당황하지 마세요. 침착할 수 있습니다. 2.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려보세요. 당신이 여유 있어 보이면, 상대는 한발 물러섭니다. 3. 받은 말은 그대로 반사! 논리적으로 싸우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안 통하니까요. 당신이 받은 모욕적인 말을 이용해서 민첩하게 받아치면 성공 확률 99%!
이번엔 필명 동가이가 ‘성추행범을 혼내준 무용담’을 보자. “체증이 다 내려간다”는 극찬을 받았던 글이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던 때다. 좌석버스 막차를 타고 집에 가던 중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버스 뒷바퀴가 있는 자리라서 자리를 내주다 보니 나는 다리를 오므려 발을 받침대에 올리고 가방을 무릎에 얹은 웅크린 자세가 됐는데, 옆에 앉은 남자는 역시 ‘남자답게’ 다리를 쩍 벌리더니 팔짱까지 껴서 내 가슴 부위를 압박하고는 눈을 감았다. 얼마쯤 가다 허벅지 아래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방끈을 깔고 앉았나 손을 넣어보니 옆 사람의 손이 거기 있는 것이었다. 황당하게도 이놈은 손을 빼기는커녕 내 손을 꼬옥 잡는 게 아닌가. 뱃속이 심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뒤, 이번엔 허벅지 위로 놈의 손이 올라오는 거다. 열이 확 솟구쳤다. “이 새끼야, 뭐하는 거야!” 그러자 놈은 눈을 감은 채 유유히 다시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나는 놈의 뒷덜미를 잡고 일어섰다. 놈은 “아니, 이 아가씨가 왜 이러나. 허허” 했다. 나는 “왜 이러냐니, 이 새끼 내려!” 하며 놈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통로를 따라 놈을 운전기사 뒤까지 몰고 갔다. 하지만 기사는 “정류장이 아니라 못 세워요”라고 했다. 또 다른 남자는 “아가씨, 참아요” 하며 나를 잡았다. 놈이 우는 소리를 했다. “나는 그냥 자고 있었는데, 이 아가씨가 착각을 했는지…” 나는 말리던 남자를 째려보며 “이거 놔요!” 했다. 버스가 서고 문이 열렸다. “내려!” 하며 놈을 발로 뻥 찼다. 내가 그렇게 강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우선, 힘에 대한 자신감이다. 대학 때 2년 넘게 역도와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던 터였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다. 설마 놈에게 반격을 당하더라도 말려주겠지 하는 생각.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박봉의 월급쟁이 신세였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막차에서 내려 택시를 탈 돈이 없었던 것이다.
유료 기능도 폐지, 언니네 문전성시
언니네를 드나드는 이들은 20대와 30대 여성 4만여 명, 그중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은 1400∼1500명 가까이 된다. 하지만 언니네 사람들이 모두 용감무쌍한 것만은 아니다. “나의 섹스는 모두 연기였다, 여자들은 타고난 에로배우인가?”는 요지의 파격적인 경험담을 고백한 필명 노랑애벌레의 글에는 사람들이 댓글보다는 ‘쪽지 보내기’로 더 많이 반응했다. 닉네임을 쓰지만, 그것마저 드러내기를 망설이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뜻이다.

△ 언니네 인터넷 사이트의 '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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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운영진들은 2004년 11월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도 꾸렸다. ‘액션나우팀’ ‘웹사업팀’ ‘출판편집팀’ ‘문화기획팀’ ‘국제연대팀’을 통해 각종 오프라인 활동도 펼치는 중이다. 오는 5월 말부터 사이트를 개편하며 기존의 유료 기능도 없앨 계획이다. 글을 많이 쓰고 읽으면 포인트 점수가 쌓이는 식으로 참여를 늘리겠다고 한다. 그래도 돈이나 회비를 내고 싶은 사람을 위해 ‘돋움회원 되기’ 후원 기능은 남겨놓았다. 언니네트워크 출판편집팀 김수진씨는 이러한 ‘언니네 문전성시’에 대해 “눈치 보지 않고 얘기를 할 수 있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것 같다”면서 “여성들이라면 누구라도 잠깐씩이나마 편히 들러 몸을 담가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