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회 > 사람과 사회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2월07일 제596호
돌아온 안내양, 영자를 회상하다

80년대 시민자율버스에 퇴장당한 뒤 관광자원으로 부활한 버스 안내원
대통령과 시장도 못 고친 열악했던 도시생활, 그때 그 여차장들 안녕하신지

▣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사람들의 기억은 때때로 지극히 선별적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웠던 경험들도 시간이 지나면 아스라한 추억이 된다. 빛바랜 사진첩의 풍경이 그다지 아름답거나 자랑스럽지 않더라도, 우린 그 속에서 애써 흐뭇한 추억을 떠올리려 애쓴다. 그러니까, 지난 1월26일치 조간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한 안내양 기사를 보고 든 생각이다.

지난 1월25일 충남 태안군에서는 잊혀지는 추억을 되살려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농어촌 버스에 안내양을 배치해 시범 운행에 돌입했다. <조선일보>는 ‘18년 만의 오라이’라는 제목의 사회면 톱기사로 버스 뒷문을 탕탕 두 번 친 뒤 “오라이”를 외칠 때 타는 리듬을 놓고 ‘돌아온 안내양’ 정화숙(39)씨와 이장규 태안군청 교통계장이 벌이는 작은 소동을 소개했고, <중앙일보>는 ‘버스 안내양과 추억 여행을’, <한겨레>도 ‘오라이, 안내양 20년 만의 부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쏟아내며 돌아온 안내양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 전국적으로 여자 안내양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61년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는 3만 여 명의 안내양들이 있었고, 그들은 하루에 17~18시간식 일했다. (사진/ 서울시청)

1961년 초까지 버스 안내원은 남성

1960~70년대를 온몸으로 받아낸 보통의 도시 빈민들처럼 10대 중·후반의 안내양들도 자기 몫의 삶의 짐을 떠안아야 했다. 급속한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젊은이의 절반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허름한 옷 보퉁이 하나를 옆에 끼고 서울역 앞으로 나와 도시 주변부의 하층 노동자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같은 또래의 남성들이 공장 노동자·고물장수·청소부·건축 노동자·잡역부가 되는 동안, 여성들은 미싱 보조·식모·버스 안내원·화장품 판매원·성매매 여성의 삶을 강요당했다. 1969년 노동청이 조사한 생산종업원들의 최저임금 실태를 보면, 남성의 최저임금은 3500원, 여성은 그보다 1천원이 더 적은 2390원이었다. 1968년, 자장면 한 그릇에 50원 하던 시절이었다.

1973년 잡지 <세대>에 소설가 조선작이 발표한 <영자의 전성시대>는 부잣집 식모로 지내던 시골 처녀 영자가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집을 뛰쳐나와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 한쪽 팔을 잃고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하는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이 소설은 2년 뒤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 36만 명(1975년 2월11일 국도극장 개봉)을 불러모으는 대박을 터뜨리는데, 영화의 성공 원인이 단순히 영자 역을 맡았던 염복순(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탤런트 이은주씨와 비슷한 ‘필’이다)씨의 섹시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 주변엔 수많은 영자들이 있었고, 그 영자들의 고통은 보편적인 것이었으며,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은 그 영자들의 고통에 빚진 바 크다는 사실을 우린 애써 기억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영자가 만원 버스에서 굴러떨어져 한쪽 팔을 잃은 뒤 받은 보상금(30만원)을 고스란히 고향으로 부치는 장면은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당시 시대상을 고려한다 해도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 1975년 개봉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영자'를 내세워 대히트를 쳤다.

지금은 버스 차장(안내원) 하면 당연히 여성을 떠올리지만 1961년 초까지 버스 안내원은 남성의 직업이었다. 버스 차장을 남성에서 여성을 바꾸는 첫 시도는 1959년 2월에 시작된다. 그해 2월24일 <조선일보> 3면을 보면 “24일 교통부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오는 4월 초하루부터 서울 시내는 운행하는 600대 가까운 시내버스의 차장을 모조리 여차장으로 간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남자 차장들에 의하여 가끔 발생되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없이 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18시간 노동에 ‘삥땅’누명도

그러나 전국적으로 버스 안내원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게 된 것은 5·16 쿠데타가 터진 직후다. 1961년 6월17일 당시 박광옥 교통부 장관은 ‘버스 여차장 대체에 관한 건’(교륙 제739호)을 마련해 “전국 시내버스와 시외버스의 차장을 여성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거친 남자들이 손님에게 불친절해 많은 문제를 일으켜 거친 남자보다는 상냥하고 친절한 여자들이 승객을 안내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여차장 제도는 도입된 지 4~5년 만에 위기를 맞는다. 버스 회사들이 안내양들에게 강요한 노동 여건이 너무 열악해 사회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962년 11월6일치를 보면 “서울 시내버스 26개 노선에 근무하는 안내양 213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 버스 안내양 대부분은 18살 전후의 나이에, 국민학교를 나온 뒤 할 일이 없어 버스 안내양이 됐다”는 사연을 적고 있다. 그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18시간이었고, 하루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4~5시간, 식사시간은 1시간에 불과했다. 여론의 직격탄을 맞은 운수사업조합 쪽은 버스 안내양을 다시 남성으로 바꾸자고 건의한다. 건의의 근거는 “버스 차장의 노동 조건이 열악해 여성들에게 부적격한데다, 자동차 기술을 얻어 군에 입대하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경제적 수입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성 안내양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1961년 당시 1만2560명에 달했던 버스 안내양은 1971년 그 3배인 3만3504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신문들은 박봉에 시달려 요금 일부를 ‘삥땅’친 안내양들과 그에 맞서 남자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안내양들을 알몸 수색하는 버스 회사와 깜빡 한눈을 팔다 차 밖으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친 안내양과 “사귀자”는 가짜 대학생의 꼬임에 넘어간 안내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안내양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 안내양들의 딱한 사연은 정권에도 큰 고민이었다. 양택식 서울시장이 안내양들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안내양들의 딱한 사정을 보면서, ‘그분’의 심기가 편했을 리 없다. 1973년 9월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에 여차장들의 생활시설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한겨레21>이 국가기록원에 정보 공개를 청구해 확인한 ‘시내버스 여차장 후생시설 개선결과 보고’를 보면, 서울시는 지시를 받은 지 채 한 달이 못 된 그해 10월16일 ‘버스 안내원 후생시설 개선대책’을 내놓는다. 대책에서 서울시는 숙소·휴게실·교양실·운동시설·위생시설 등 5가지 시설을 모두 보유한 회사를 A급, 4개 이상을 보유한 회사를 B급, 3개 이상을 보유한 회사를 C급 등으로 나눠 관리에 들어간다. 서울 구의동 59-13에 주차장을 둔 동부운수 등 10개 회사가 ‘숙소 완전 보이라(보일러) 설치’ 등의 이유로 모범업체로 선정돼 특별 관리된다. 양택식 시장이 이끌던 서울시는 시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업체는 “면허 취소 등 본보기로 강경 조치”한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안내양들의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서울시가 1973년 10월에 작성한 개선대책을 보면 안내양들의 주당 근무시간은 48시간, 좌석버스 근무자의 경우 하루 일하면 하루 쉴 수 있었고 시내버스 근무자는 이틀 일하면 하루 쉴 수 있었다. 좌석버스 한 대당 안내양의 수는 2.3명, 입석버스는 한 대당 3.3명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울시가 제시한 모범 기준일 뿐 현장의 근무 여건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유신의 심장을 겨눈 궁정동의 총성 이후 시대는 ‘대망의 80년대’로 접어들었다. 버스도 안내양도 시간의 변화를 비껴갈 순 없었다. 등장만큼 퇴장도 극적이었다. 1982년 9월10일 서울 시내에 안내양이 없는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했고 이후 안내양은 재빠른 속도로 서울 도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거듭된 경제 성장으로 하루 17~18시간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 했던 ‘안내양’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든데다, 버스 회사들도 비용 절감을 위해 1984년 9월부터 시민자율버스를 본격 도입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버스의 마지막 안내양들은 경기도 김포에서 광화문까지 운행하는 김포교통 소속 130번 안내양 38명이었다. 1989년 4월21일 안내양 기숙사에서 <조선일보> 기자와 만난 안내양들은 각자의 미래 계획을 펼쳐놓는다. 김은미(22·이하 당시 나이)씨는 “집으로 돌아가 쉬면서 두 달 뒤에는 시집갈 계획”이라고 말했고, 이효숙(23)씨는 “3년간 저축한 1천여만원으로 고향 인천에 내려가 조그만 탁구장을 경영하겠다”고 말했다. 김영화(22)씨는 “당분간 쉬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50대 중년 여성이 됐을 그들이 원하던 것을 얻었는지 확인할 도리는 없다.


△ 충남 태안군에서 사라진 안내양이 17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 정화숙(39)씨는 차문을 두번 탕탕 친 뒤 "오라이"를 외친다고 한다. (사진/ 연합)

온갖 낭설에 쉬쉬… 89년에 역사 속으로

1989년 12월30일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의 6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법 조문이 삭제되면서 ‘안내양’의 법적 근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안내양은 아기를 못 낳는다” “운전사들이 안내양을 하나씩 데리고 산다”는 낭설에 시달리던 그들은 자신이 안내양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설 나이가 된 ‘그때 그 언니’들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영자들은 서울에 왜 왔나

1974년 연구에 따르면 돈벌이가 1위… 직공과 식모로의 이직 꿈꿔

그때 그 여성들은 왜 서울로 올라온 것일까.

이화여대 농촌문제연구소가 1974년 펴낸 <이촌여성의 도시생활 적응 및 직업이동에 관한 연구>를 보면, 가장 큰 이유는 짐작대로 “취직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40.5%)인 것으로 나타난다. “도시에 살고 싶어서”(18.5%), “교육·기술 습득을 위해”(18.0%), “집안이 가난해서”(12.9%), “집안의 가정불화 때문에”(4.5%) 등이 뒤를 이었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면, 영자도 “기술을 배워야 어디 가서 취직을 하지”라며 술 마시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자가 안내양으로 취업을 하게 된 것은 운전 기술을 배워 버젓하게 택시 운전사로 나선 어떤 여성의 모습을 거리에서 마주친 뒤다.

서울로 올라온 여성들 가운데는 10대 후반의 미성년자가 많았다. 1967년 서울시 부녀과에서 조사한 농촌에서 올라온 어린 여성들에 대한 통계를 보면 조사 대상 6740명 가운데 18살 미만의 여성이 37.4%인 2527명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 19.4%인 1313명, 초등학교를 겨우 나온 사람들이 63.0%인 4250명이었다. 영자는 월남에서 온 창수의 편지를 반갑게 뜯어 읽어볼 정도는 됐으니 까막눈은 아니었다.

그들이 희망했던 직업은 직공과 식모가 많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김정화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은 2002년 <역사연구>에 발표한 논문 ‘1960년대 여성노동 - 식모와 버스 안내양을 중심으로’에서 “무작정 상경한 어린 여성은 범죄(특히 윤락)에 빠질 수밖에 없어 감시하고 교화하는 대상이 됐다”고 적었다. 영자와 그보다 7~8년쯤 먼저 서울에 올라온 길녀(이호철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게 서울은 아직 낯설고 먼 ‘그들만의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