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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레,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베트남의 전설적 게릴라 출신 작가 겸 영화감독… 한국에서 수모를 당하고 감동을 주다
“반레가 아직도 안 나왔어!” 10월1일 오전 9시30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소설가 방현석씨는 동료 문인들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사람들 나온 지 한참 됐어. 비행기 타긴 탄 거야?”
같은 시각, 인천공항 출입국관리사무소. 이곳으로 특별히 ‘모셔진’ 반레는 ‘잠재적 불법체류자’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후진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국에서 한번쯤 겪을 수 있는 통과의례! 그가 유명작가라는 걸 뭘로 증명할 것인가. 영어에 능숙지 못한 그는 손짓발짓을 하다 모든 의사소통을 포기한 채 침묵으로 ‘긴 억류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시각은 오전 10시50분. 베트남의 전설적인 게릴라 전사였고,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로 베트남은 물론 한국 독자들을 감화시킨 그가 한국에 내디딘 첫발은 참으로 모욕적이었다.
‘잠재적 불법체류자’ 취급… 두 시간 이상 억류
“콩 사오(괜찮아요).” 그럼에도 그는 손을 저으며 웃었다. 가식으로 볼 수 없는, 너무나 사람 좋은 웃음이었다. 숙소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작은 베트남 전통 기념품을 수줍게 내밀었다. 포장지는 군데군데 뜯겨 있었다. ‘수색’당한 흔적이었다. 그래도 그저 빙그레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마약인 줄 오해했나?”
10월2일 저녁, 광화문의 한 음식점. 소설가 방현석씨의 황순원문학상 수상(상자기사 참조)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문인들이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맨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반레는 식사할 틈도 없었다. “지난번 댁으로 찾아뵀던 시인 고형렬입니다.” “호치민 영화사에서 인사드렸던 소설가 이대환입니다.” 작가들이 쉼 없이 건네는 인사는 의례적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거기엔 왠지 모를 존경의 마음이 묻어났다. 그걸 보면서 문득 반레의 ‘인기 비결’이 궁금해졌다. 예전에도 베트남을 다녀온 이들이 ‘반레’를 화제 삼던 일을 여러 번 접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 진정성이 빛나는 작품은 2002년 12월 한국에서 출간된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이라는 소설이다. 이는 10편이나 되는 그의 소설 중 한국에서 번역된 유일한 작품이다. 전선에 나가 싸우다 죽은 응웬꾸앙빈이라는 주인공의 애달픈 청춘이, 이승과 황천을 오고 가며 펼쳐진다. “몇권의 베트남 소설이 소개된 바 있지만 반레의 소설만큼 균형잡힌 시각과 깊은 성찰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는 게 소설가 방현석씨의 견해다. “반레의 소설은 전쟁도 파괴시키지 못한 숭고한 인간의 흔적을 주목한다. 읽고 나면 베트남의 역사를 지탱해온 신비를 감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망월동 김남주 묘역에서 울음을 삼키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것은 넉넉하고 낙관적이면서도 슬프다.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68년 구정 대공세 때였다. 아침에 싸우러 나갈 때마다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죽어 돌아올 자들의 무덤이었다. 그걸 볼 때마다 이렇게 농을 걸었다. ‘어이, 깊게 파줘. 안 그럼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거야.’ 논에선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일하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햇빛이 쨍하고 여인의 종아리에 부딪쳤다.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 종아리를 잊지 못한다. 그날 어떻게 총을 들고 싸웠는지 아무런 기억이 안 난다. 난 청춘이었다. 그게 지금은 슬프다.” 10월5일. 일요일인 이날은 서울시내 관광 일정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쇼핑이나 관광은 한사코 사양했다. 안내하던 이들이 물었다. “가고 싶은 데가 있긴 있느냐.” 그러자 뜻밖의 답변이 나왔다. “할 수 있다면, 광주 망월동의 시인 김남주 묘역을 참배하고 싶다.” 1980년대 초반 베트남의 라디오에서 김남주의 시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감옥에서 시를 썼다는 ‘한국의 전사시인’을 생각하며, 호치민을 떠올렸다고 한다. 망월동을 찾은 그는 김남주의 무덤에 국화꽃 다섯 송이를 바쳤다. 그리고 세번 절을 했다. 일어나서 그는 조용히 흐느꼈다. 이름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무덤을 지나며 울음은 깊어졌다. 사라져간 친구들을 회상한 것일까. 베트남에도 전쟁을 통속적으로 다루는 작가들이 없지 않다. 물론 반레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꽉 막힌 외골수다. 그래서 한국의 작가들은 더욱 그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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