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규 기자/ 한겨레 사회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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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윤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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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산주의자들의 배후 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하여 1천여명을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여….”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의 인혁당·민청학련 조사발표를 전해들은 서현(52) 변호사는 그날의 울분이 다시 터져나올 듯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때 영장 없이 체포된 1천여 명 중 한 명이었다. 미란다 원칙을 적용받지 못했더라도 그때의 ‘구속’이 영장도 없는 불법 행위였다니, 30년 전의 법학도로서 지금의 법률가로서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의 ‘광풍’은 서울대 법대 2학년이던 1973년,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은 ‘전력’이 있는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1974년 3월31일 새벽 3시, 그는 10여 명의 경찰들에 연행돼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중정 요원들은 무자비한 몽둥이 찜질과 함께 민청학련의 주역인 이철·유인태씨와의 관계 등을 캐물었다. “4월 초에 거사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던 그는 3일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서울구치소(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그곳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하재완씨도 수용돼 있었다.
“10시에 취침을 하는데, 새벽 2~3시 정도 되면 형무소 철문이 여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들리고, 어떤 사람이 신음소리와 함께 질질 끌려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요. 하루에 한 번 뺑끼통(구치소에서 오물을 받아내는 용기) 비울 때 옆방 사람들과 잠깐 얘기할 수 있었는데, 하씨가 엄청나게 고문당하고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불법 감금된 지 40일 만에 풀려났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해 9월 학교는 그를 무기정학 처리했고, 이 징계를 핑계로 76년 2월 예정됐던 졸업도 취소되는 불이익을 당하면서 군대에 끌려갔다. 제대 뒤에는 아예 판·검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건설회사에 들어가, 1981년 이라크 근무를 지원하고 여권을 신청했으나 ‘신원특이자’라는 이유로 여권 발급이 반려되는 수모를 겪었다. 중정의 이름이 안기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의 ‘전력’은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모교 은사들의 ‘신원보증’으로 어렵사리 출국할 수 있었던 그는 울분을 삼키며 83년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해, 87년 ‘바뀐 세상’에서 판사가 될 수 있었다.
지난 8일 서 변호사는 국가를 상대로 3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 쪽에 수사기록을 요청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낱낱이 밝혀보고 싶다”는 게 그의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