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해안을 빼앗긴 볼리비아… 엄청난 천연자원을 깔고 앉은 빈국

라파스(볼리비아)= 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라파스(La Paz)는 스페인어로 ‘평화’를 뜻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압제를 피해 점차 높은 곳으로 올라가던 인디오들은 1548년 10월20일 안데스 산맥 동쪽 고원지대에 한 마을을 세웠다. 그곳은 너무 고지대여서 춥고 산소가 희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조금씩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화구 안처럼 생긴 살기 좋은 곳을 발견하고 정착을 계속했다. 인디오들이 그렇게 건설한 도시가 오늘날 ‘라파스’와 ‘엘알토’다.

△ 티티카카 호수를 배로 건너는 촐리타들. 건너편에 있는 것이 해군부대다.

칠레로 송유관 놓으려던 대통령 내쫓다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스는 해발 3195m, 공항이 있는 알토는 라파스보다 더 높은 해발 3980m에 있다. 산과 나란히 날던 비행기가 착륙하자 숨이 턱 막혀온다. 졸도해 산소마스크를 쓰는 사람도 일부 있다고 한다. 인디오들은 그런 땅에서 정복자들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볼리비아는 전체 인구의 55%가 인디오로, 남미에서 인디오의 비중이 가장 높다. 사람들이 가끔 ‘불가리아’로 착각하기도 하는 볼리비아는, 남미 독립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 ‘볼리바르의 나라’란 뜻을 갖고 있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볼리비아를 “황금의자에 앉은 거지”라고 말한다. 남미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볼리비아엔 석유와 천연가스, 구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천연가스는 세계 2위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그런데도 750만 인구의 1인당 국민소득은 1천달러가 못 되는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남아 있다. 광산노동자나 농업노동자의 급여는 하루 3달러, 월 100달러가 보통이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평야지대에서는 아무 데서나 쉽게 딸 수 있는 과일들이 넘쳐나, 굶주리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볼리비아는 왜 그토록 좋은 조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못사는 나라가 돼 있을까? 1825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200여 차례의 쿠데타로 190번이나 정권이 바뀔 정도로 불안정했던 정치에 가장 큰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바다’를 갖지 못했다는 점을 발전이 지체된 요인으로 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볼리비아가 처음부터 바다를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볼리비아는 1879년 칠레와 벌인 이른바 ‘태평양 전쟁’에서 패해 해안 국경을 잃었다. 이때부터 볼리비아는 파라과이와 더불어 남미에서 해안선을 갖지 못한 두 나라가 됐다.

라파스에서 100km가량 떨어진 티티카카 호수 앞의 티키나 마을엔 한 전쟁영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에두아르도 아바로마는 태평양 전쟁 당시 리토랄시에 살고 있던 거부였다. 당시 볼리비아 군인들은 3천여명의 칠레 군인들에 의해 밀려 모두 항복했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1879년 3월23일 그는 120명의 군인들과 함께 끝까지 항전했다. 에두아르도를 포함해 그들은 모두 죽었다. 동상 아래에는 바다를 되찾겠다는 볼리비아 사람들의 염원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볼리비아는 바다로 가는 길을 요구한다.” “한때는 우리 것이었으니 언젠가는 다시 우리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에두아르도가 칠레를 향해 ‘진격’을 외치고 있다고 말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에두아르도가 결사항전을 했던 날을 ‘바다의 날’로 정해 해마다 대대적인 행사를 벌인다. 올해도 라파스시의 각급 학교와 기관별로 국기와 기관을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올해 행사는 지난해보다 훨씬 ‘격렬’했다. 사람들은 “바다를 내놓으라”고 쓴 피켓을 앞세웠다. 지난해 말, 칠레쪽으로 송유관을 이어 천연가스를 수출하려던 현직 대통령을 국민봉기로 몰아낸 직후였던 까닭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원의 도시

비록 바다는 없지만, 볼리비아에도 5천여명의 해군이 있다. 티키나 마을에서 티티카카 호수를 건너면 한 해군부대가 있다. 군인들은 바다가 아니라 바다처럼 넓은 티티카카 호수를 지킨다. 물론 함정 같은 것은 없다. 배라고 해야 1t 안팎의 순찰정 몇대가 전부다. 페루와는 사이가 좋기 때문에 전투함이 필요 없다고 한 군인이 설명했다. 바다 문제에 대해 해군은 매우 신중했다. 부대장 카바스 대령은 “바다 문제이고 칠레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라면 대답할 수 없다. 사령부에 얘기를 해놓았으니 장군을 만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급군인들은 달랐다. 나비우 중사는 “우리는 한번도 바다를 잊어본 적이 없다. 지금은 힘이 없어 (칠레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지만, 언젠가는 (바다를)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태평양 전쟁 때의 영웅 에두아르도 상. ‘바다를 되찾자’는 염원을 담고 있다.

볼리비아는 바다로 가는 출구로 라파스에서 500km 떨어진 칠레의 아리카 항구를 이용한다. 한때는 페루의 땅이었지만, 태평양 전쟁 때 칠레가 빼앗은 곳이다. 아리카 항구는 볼리비아가 수입하는 외국 제품의 주요 통로다. 볼리비아 부자들이 여름이면 해수욕을 즐기러 가는 곳이기도 하다. 왕복 100달러의 요금에 비행기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족히 10시간은 걸린다.

칠레 국경 근처의 탐보케마도 마을은 라파스에서 330km 떨어져 있다. 국경으로 향하는 2차선 포장도로는 곳곳이 패어 있고 중앙선도 그려져 있지 않다. 가끔 나타나는 대형 트럭들은 위태롭게 중앙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차가 달릴수록 차 안에 달린 온도계는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음을 가리켰다. 출발할 때 16도였으나 온도는 11도까지 떨어졌다. 인디오들은 그 높은 곳에서도 양이나 소를 몰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몇 발짝 움직여도 숨이 차온다. 해발 4600m, 마침내 탐보케마도 마을이다.

탐보케마도는 10여채의 집에, 세관, 이민국 사무소로 구성된 작은 마을이다. 노래 테이프를 파는 사람과 과일을 파는 사람도 있다. 2명의 촐리타(원주민 여자)가 환전을 해주고 있었다. 취재진처럼 별도의 차량으로 이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버스를 이용해 국경을 넘는다. 볼리비아와 칠레에서 1~2대씩의 버스가 이른 아침에 출발한다. 세관 직원인 움베르토 에르게사는 “하루에 30~40대의 차량이 칠레에서 볼리비아로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최근 경제가 나빠져 크게 줄어든 것이라고 한다. 이키케에서 원단수입상을 했던 교포 김형웅(60)씨는 “몇년 전만 해도 아리카에서 하루 80대의 트레일러가 볼리비아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아리카는 사실상 볼리비아가 이용하는 항구라는 것이다.

옥타비오는 볼리비아의 트럭 운전사다. 그는 볼리비아로 수입된 차를 다시 칠레로 실어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15년 정도 이 일을 했는데, 한달에 3번 정도 왔다갔다 한다”며 “국경을 넘나드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칠레는 해안선이 7천km에 이르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100km쯤 우리에게 준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칠레 사람들도 절반은 바다를 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은 보통의 볼리비아 사람이 가진 바람을 담고 있다.

△ 국경마을 탐보케마도의 노점상들. 사진을 찍지 말라고 손을 내젓고 있다.

아리카 항구로 이어지는 행상 행렬

오마르디에스는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 운송회사에서 5년째 일하면서, 칠레를 넘나들고 있다. 그는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스에서 콩, 간장 등을 싣고 칠레로 간 뒤 칠레에서 다시 원단 같은 수입품을 싣고 들어온다. 사흘씩 걸리는 이 운행을 그는 5년째 계속하고 있다. 그도 볼리비아가 바다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칠레 사람들이 항구 운영을 훨씬 잘 한다”며 어떤 점에서는 현재 상태가 나을 수도 있다고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 중엔 보따리 무역상들도 많다. 칠레로부터 버스가 도착하자, 30여명의 승객이 세관검사를 위해 모두 짐을 내렸다. 세관원은 일일이 가방을 열어보았다. 짐 가운데서 사과상자를 발견하자 그는 바로 압수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페르난도 갈반은 보따리장사꾼이다. 그는 “두달에 한번씩 칠레의 자유무역항인 이키케로 가서 물건을 산 뒤 아리카를 거쳐 이렇게 볼리비아로 들어갔다가 다시 아르헨티나로 간다”고 말했다. 이키케는 아리카항에서 300km 남쪽에 있다.

△ 칠레쪽에서 바라본 볼리비아 국경. ‘볼리비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쓰여있다.

탐보케마도를 떠나 칠레쪽으로 5km가량 달리자 ‘칠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푯말이 나타났다. 충가라 호수가 있는 충가라 마을.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볼리비아와 칠레쪽 이민국과 세관을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가량. 바다가 있었다면 굳이 없어도 될 이 절차는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일 것이었다.

칠레 영내로 들어서 안데스 산맥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경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관목숲이 사라지고 온통 불모의 사막만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양을 칠 수도 없고, 야생의 비쿠냐도 살지 못할 땅이다. 가드레일조차 없는 천길 낭떠러지가 먼지바람 속에 이어져 있었다. 사막은 아리카까지 계속됐다. 지루한 10시간여의 주행 끝에 마침내 해발 0m, 아리카항이 나타났다. 고산지대의 숨가쁨도 사라지고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씻어주는 곳, 볼리비아 사람들에게 바다는 그런 느낌으로 기억돼 있을 것이다.

△ 칠레의 아리카항에서 볼리비아의 라파스로 달리고 있는 화물트럭.

칠레 사람들은 볼리비아의 바다 반환 요구에 대해 대개 침묵한다. 볼리비아 사람과 11년 전 결혼해 라파스에서 살고 있다는 마리아파스는 “나는 분명히 칠레 여자”라고 말했다. 그는 “칠레가 바다는 주지 않고 가스를 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고 에둘러 말했다. 물론 볼리비아에서도 칠레가 바다를 쉽게 넘겨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엄청난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칠레가 북부 해안지대를 빼앗은 것은 단순히 바다 때문이 아니었다. 칠레 북부 지대에 매장된 엄청난 천연자원 때문이었다.

볼리비아의 곤살로 산체스 전 대통령은 라파스 북부 융가스 유전의 천연가스를 칠레로 송유관을 통해 보낸 뒤 외국에 수출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볼리비아의 노동조합들과 시민운동 그룹은 이를 반대하는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코카 재배를 줄이려는 정부의 시도에 대해 코카 재배 농민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도 시위를 키웠다. 이들은 볼리비아의 천연가스 수출이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보다는 외국 투자가들과 고위 정치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라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라”며 시위대는 라파스를 봉쇄했다.

△ 칠레쪽에서 온 여행객들이 국경마을에서 세관검사를 마친 뒤 다시 버스에 오르고 있다.

천연가스 수출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볼리비아 TV 네트워크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라파스, 알토 등 서부 볼리비아에 사는 사람들의 70%는 가스 수출에 반대했다. 그러나 산타크루스, 타리자, 수크레 등 남부지방에서는 58%가 정부의 계획을 지지했다. 칠레와 인접한 서부지역에서 정부 계획에 대한 반대가 훨씬 강력했던 것은 ‘칠레’와의 오랜 원한 때문이었다. 바다를 빼앗아간 ‘칠레를 통해 천연가스를 수출한다’는 것이 국민 감정에 불을 지른 것이다.

사태 발생 이후 75명 이상이 시위 도중 숨졌다. 시위대는 가스 수출 반대를 넘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2003년 10월17일 곤살로 산체스 대통령은 취임 1년 만에 대통령직을 버리고 마이애미로 달아났다. 대통령은 카를로스 메사 부통령이 승계했다. 볼리비아는 아직 천연가스 수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칠레가 아니라면 페루 해안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너무 많은 돈이 든다. 엄청난 자원을 깔고 앉은 볼리비아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한 채로 남아, 바다 잃은 한을 그렇게 곱씹고 있었다.

이리저리 뜯긴 영토 남미의 중앙에 자리잡은 볼리비아는 국경의 동쪽과 남쪽을 브라질과, 남동쪽은 파라과이와 각각 접하고 있다. 또 남쪽엔 아르헨티나, 서쪽엔 페루, 칠레가 있어 모두 5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여러 나라와 접해 있는 만큼 분쟁도 적지 않았다. 특히 거대한 땅을 빼앗으려는 이웃나라들의 시도에 볼리비아는 계속 당해왔다. 볼리비아는 1879~82년에 벌인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해 태평양과 면해 있던 안토파가스타주를 빼앗겼다. 칠레는 이때 페루의 일부 지역까지 빼앗아 해안선을 850km나 늘렸다. 땅만 넓을 뿐 실력이 없던 볼리비아는 이후에도 많은 땅을 잃었다. 1900년 천연고무 개발을 둘러싼 갈등으로 북부의 한 지방이 분리를 선언했고, 1903년에는 동부의 광대한 지역이 브라질에 넘어갔다. 1932~35년에 파라과이와 벌인 ‘차코 전쟁’에서도 져, 볼리비아는 차코 지방을 빼앗겼다. 이로 인해 한때 200만㎢에 육박하던 영토가 지금은 109만㎢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친 정도의 넓이다. 내륙국이 된 볼리비아는 바다로 열린 출구를 찾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1956년 볼리비아는 티티카카 호수의 사용권을 칠레에 주고, 칠레가 볼리비아에 태평양 진출을 허용하기로 칠레와 외상간 합의를 했다. 하지만 페루가 “티티카카 호수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공동 소유”라며 반대해 볼리비아의 해양 진출은 무산됐다. 더욱이 칠레가 볼리비아와 공동 소유인 라우카강을 일방적으로 사용하자 1962년 단교를 선언했다. 칠레의 피노체트가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뒤 볼리비아의 해양 진출에 협조할 뜻을 비치면서 국교는 재개됐다. 칠레는 볼리비아와 영토를 교환해 해양통로를 제공하고, 페루와의 사이에 완충지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러나 페루쪽이 해당 지역을 공동 관리하자고 주장하면서 협상이 진전되지 못했다. 1978년에는 칠레쪽이 불성실한 자세로 임한다는 이유로 볼리비아가 다시 단교를 선언했다. 이후 81년에 양국간 교섭이 재개됐으나, 칠레는 영토교환을, 볼리비아는 국제기구를 통한 해결을 추구해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1992년 양국간 비자면제 협정, 1993년 산체스 대통령의 칠레 방문과 경제협력 협정, 1995년 관세협정이 체결되는 등 지도층에서는 양국 관계가 과거에 비해 매우 호전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