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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01월28일 제4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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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대화는 있어도 타협은 없다”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 체제의 도전과 실험… 노사관계 새틀 짜며 사회개혁 투쟁에 주력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 체제의 새로운 도전과 실험이 시작됐다. ‘투쟁적 교섭’을 통해 노사관계 틀을 새로 짜며 사회개혁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준비된 투쟁을 주장하는 이수호식 변화의 바람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지난 1월16일 민주노총 제4기 지도부 선거에서 새 위원장에 선출된 이수호(55) 전 전교조 위원장은 이른바 ‘국민파’로 불린다. 민주노총 내부의 여러 노선 가운데 ‘국민·대중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국민노선)을 지향하는 중도우파 그룹이다. 중학교 교사 출신으로 지난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그는 민주노총 사무총장과 전교조 위원장을 거쳐 이제 한국 노동운동을 이끄는 인물로 역사의 전면에 섰다. 휴일인 지난 1월25일 낮 이수호 선거대책본부로 쓰인 광화문 노동운동전략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 민주노총 새 위원장으로 뽑힌 이수호 전 전교조 위원장. 이 위원장은 노-정 관계가 민주노총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원칙 속에서 풀려야 한다고 말한다.(이용호 기자)

이 연구소는 2001년 이후 이 위원장을 비롯한 국민파 멤버들을 주축으로 구성한 모임이다. 네댓평 남짓한 선대본 사무실은 여기가 한 나라의 노동운동을 이끌어갈 당선자 캠프인가 싶을 정도로 썰렁했다. 사무실에는 이 위원장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사무총장에 당선된 이석행(46) 전 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 등 단 둘밖에 없었다. 난방도 안 돼 추운 사무실 한켠, 선거 팸플릿이 아직 어지럽게 널린 회의실에서 이 위원장과 마주 앉았다. 그의 점퍼 왼쪽 가슴에 새겨진 ‘저지와 분쇄를 넘어 쟁취·확보를!’이란 문구가 선명했다.

교섭과 혁신, 그 의미 있는 변화

이번 민주노총 임원선거는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 아래 ‘교섭과 혁신’을 내세운 이수호 후보 진영과 단병호 전 위원장의 노선을 이어받아 ‘투쟁과 힘’을 내건 현장 범좌파 그룹의 유덕상(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후보 진영이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따라서 좌우로 구도가 확연히 갈리는 조직선거 양상을 띠었다. 이수호 체제가 단병호 전 위원장의 강경투쟁 노선과 달리 대화와 혁신을 주장하고 나선 만큼, 민주노총의 투쟁방식과 노선에 ‘의미 있는 변화’가 점쳐지고 있다. 그가 기치로 내건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선, 잔뜩 얼어붙어 있는 노무현 정부와 민주노총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가 가장 큰 관심거리다. 이수호 체제는 노무현 정부와 임기를 같이하게 된다. 그가 표방한 국민노선 때문인지, 선거 기간 중 상대편 후보의 팸플릿에 “노동자냐 노무현이냐”는 문구까지 등장할 정도로 대의원들이 그를 선택하는 건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계급투표를 하지 않고 오히려 투쟁의 대상인 노무현 편에 가까운 후보를 택하면 반노동자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식의 엉뚱한 혐의까지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한국적 노사관계 현실에서 전투적 노동운동은 불가피하다”고 못박았다. 이어 “총파업을 남발하지 않겠지만 투쟁이란 카드는 언제나 우리의 가장 큰 힘이다. 노동자에게 주어진 싸움할 수 있는 권리를 통해 사용자와 정부를 압박할 것이다. 우리 새 집행부 면면을 봐라. 운동판에서 20년 이상씩 현장 중심으로 꿋꿋이 전투적인 싸움을 해온 사람들의 집결체다.”


△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성과주의’이다.” 이수호 위원장이 서울 광화문 노동운동전략연구소에서 새로 뽑힌 민주노총 지도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이용호 기자)

그는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은 ‘성과주의’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진단했다. 청와대는 노동개혁을 노무현 대통령의 치적 한 건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반면, 노동자들은 투쟁하고 싸워서 쟁취한 것으로 정리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민주노총을 도와주고 싶다’고 겉으로 말하고 있지만, 폼만 잡으려 하지 말고 공공부문의 손배·가압류부터 풀고 구속 노동자를 석방해야 한다. 우리도 변하겠다고 한 만큼 정부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를 바꾸자!’며 혁신을 주장한 슬로건 속에는 이런 뜻도 숨어 있다.”

“노무현 정부는 손배 · 가압류부터 풀어야”

원칙 없이는 제휴도 없다고 했던가? 그는 인터뷰 내내 ‘타협’이란 표현을 단 한번도 쓰지 않았다. 정권과의 타협적 노사관계도, 정권에 단호하게 맞서는 투쟁 기조를 표방한 것도 아니지만 원칙을 잡고 나가면 된다는 게 오랜 노동운동에서 그가 얻은 교훈인 듯했다. “정부가 노동문제 처리에서 원칙 없이 흔들리고 있다. 사용자와 보수여론의 공세에 밀려 이랬다저랬다하는데 민주노총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원칙 속에서 노-정 관계를 풀어야 한다. 우리와 전혀 상의 없이 정부가 정책을 하나 툭 던져놓고,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는 당연히 반대 싸움에 나서는 식의 악순환은 사회적 비용만 초래한다. 노조가 나라 망친다고 떠들 게 아니라 노동운동이 그만큼 우리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와 머리를 맞대고 협의해야 한다.”


△ 지난 1월16일 열린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교섭과 혁신’의 이수호 후보가 ‘투쟁과 힘’을 표방한 유덕상 후보를 누르고 새 위원장에 당선됐다.(박승화 기자)

이 위원장의 운동방식은 ‘투쟁적 교섭’이란 말로 압축된다. 투쟁을 바탕으로 할 때만이 힘 있는 교섭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교섭을 중시하다가 우왕좌왕하면 혼란만 가중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그동안 민주노총은 상대방(자본과 정부)이 먼저 던지는 돌에 늘 공격당하고 그것을 저지·분쇄하는 싸움을 해왔다”며 “그러나 이제 우리가 먼저 의제와 대안을 내고 대화와 교섭을 통해 따내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투쟁만 외치다 얻은 것은 없고 오히려 조합원들이 지치고 동원능력만 떨어졌다거나, 노동운동이 조합원들한테 불신받고 국민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다는 내부 비판에 대한 나름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변화만큼 운동도 변해야 한다.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를 확보하고 쟁취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물론 투쟁과 조합원 동원에만 의존해온 방식에서 벗어나겠다고 했지만, 그가 저항하지 않은 채 실리만을 추구한다거나 투쟁을 회피하고 소극적으로 사실상 투항할 것이라고 섣불리 점치는 건 그야말로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 새 집행부가 싸움을 잘 안 하려들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 모양인데, 파업을 할 때는 제대로 할 것이다. 총파업 선언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을 뿐이다. 내 임기 중에 전 산업과 농민·시민사회단체를 아우르는, 세상을 재편할 수 있는 위력적인 싸움이 한판 붙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자뿐 아니라 국민들의 삶 전체를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노-정, 노-사간 긴장은 지속될 공산이 크다.

비타협적 투쟁 관행보다는 준비된 파업을

그러나 그는 그동안 민주노총이 수없이 되풀이해온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은 이제 양치기 소년 비슷하게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총파업이 남발되면서 구호에 그치다보니 그때마다 ‘이번에는 진짜로 크게 싸운다, 모두 거리로 나오라’고 하는 양상으로 변질됐다는 얘기다. 결국 문제는 운동의 ‘작풍’이다. “지도부가 총파업을 결정했는데도 참가 조합원이 3만명, 5만명 정도에 불과한 것은 엄청난 문제다. 조합원들이 끌려나오듯이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그러다보니 참가해도 힘 빠지고 참가하지 않아도 괴롭다. 이래서는 안 된다. 실제로 할 수 있는 준비된 파업을 조직해야 한다.” 파업 일정을 미리 박아놓고 무조건 머리띠 두르는 식의 비타협적 투쟁 관행을 떨쳐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고립돼 혼자 싸운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민주노총 투쟁의 역사는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시대변화에 맞지 않고 말로만 외치고 이념의 노예가 됐던 과거는 과감하게 벗어버리겠다.” 그는 특히, 중요한 이슈가 터지면 직접 70만 조합원들을 상대로 ‘총파업 조합원 찬반투표제’를 실시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전자투표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작고 나지막했다. 거칠고 선동적인 목소리도, 대중을 한순간에 휘어잡는 힘 있고 뚝뚝 매듭지어지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강고한 카리스마를 지닌 명망가와는 본래부터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그럴까? 지난 1979년 영국 대처가 총리 자리에 올랐을 때 영국노총(TUC)의 산별연맹 위원장들을 만난 뒤 “직접 만나 얘기해보니 과격하기는커녕 아주 순박하고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 같은 사람들이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자, 그가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었다. “민주노총에서 내가 할 역할은 막대기요.” 지금은 살이 좀 붙었지만 예전에 비쩍 마른 그의 몸 때문에 그에게는 ‘막대기’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막대기는 지휘봉으로, 칼로, 매로, 어떤 때는 부지깽이로도 쓸 수 있어요. 나는 도구일 뿐입니다. 나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쓰기 나름이죠.” 그러면서도 “외롭고 고독한 결단을 해야 하는 건 위원장으로서 내 몫”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만큼 선생님 출신이라는 이미지가 언뜻언뜻 느껴지다가도 그 뒤편에는 강철같이 단련된 철의 노동자라는 인상이 동시에 묻어났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칼’처럼.

노-사-정 협의 틀 필요… 정규직 기득권 양보

대정부 관계와 투쟁방식의 변화 못지않게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할 것인지 여부도 큰 관심사다. 노사정위에 참가한다면 이는 민주노총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단병호 체제의 민주노총 지도부 안에서 노사정위 참가를 주장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현존하는 노사정위원회는 어떻게 의미부여를 하더라도 분명히 아니다. 구성도, 역사적으로도, 운영방식도 잘못돼 있다. 노-사-정 사이의 힘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아 아무리 잘한다 해도 노동자가 결국 손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교섭을 투쟁에 뒤따르는 산물로만 봐서는 안 된다”며 투쟁 이전에 노-사-정이 협의하는 틀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노사정위에서 논의하고 해결한다는 식으로 노사정위를 과도하게 자리매김하면 안 된다. 사업장에서의 산별교섭을 핵심 축으로 하고 정부와 직접 노-정 교섭도 하면서 사회적 의제, 예컨대 제조업 공동화·일자리 창출·사회 안전망 등은 사회적 교섭이 필요하다. 새로운 노-사-정 틀이 만들어진다면 오히려 우리가 공격적으로 의제를 제시하고 협의할 것이다.” 현실주의에 기반한 노사정위원회의 ‘제한적 활용론’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의사 등 다른 집단에게는 주지 않고 오직 노동자에게만 부여하는 사회적 합의기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나아가 연금·교육·의료·교통 문제까지 사회 공공성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민주노총이 먼저 대안과 정책을 내놓고 의제를 제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의 한 축이다.

사회 · 정치적 수준의 투쟁 · 교섭 예고

민주노총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조직이다. 자본의 역사가 통합의 역사였다면 노동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고 했던가? 한국 노동운동이 당면한 최대 과제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그는 “(사용자와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과는 별도로 노동자 내부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기득권을 상당 부분 양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하청·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감성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 어렵더라도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 대공장의 경우 회사가 노조에 근로자복지기금을 적립해주고 있는데, 이 기금을 사회연대기금으로 돌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쓴다든지, 임단협 협상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 해소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

보수여론에 의해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이 임금인상만 추구할 게 아니라 오히려 연금 등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싸움을 전개하면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실질직 이익이 돌아간다는 논리다. 임금인상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주의적 전투성’에서 벗어나 사회개혁 투쟁에 주력할 것임을 거듭 예고한 것이다. 결국 이수호 체제에서 나타날 노-정, 노-사 관계의 ‘변화’는 개별 사업장을 넘어 사회적·정치적 수준에서 투쟁과 교섭이 벌어지는 양상으로 전개될 공산이 커 보였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