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 ] 2002년07월31일 제420호 

할머니 품에서 잠들었나?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사진/ 신현림 l 시인·사진가


여행 가서 음식점도 잘 골라야 하지만 숙박지는 더 잘 선택해야 한다. 나이 먹을수록 까다로워지고 문명에 길들여진 생활로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지금보다 젊을 때 힘들게 여행해선지 이젠 방이 뜨겁거나 퀴퀴해도, 이불에서 냄새나도 견디기 힘들다. 장소와 사물도 인연의 기운이란 게 있어서 기분 좋은 곳에 묵으면 추억도 아름답긴 하더라.

언제였던가? 여행 첫날 부석사에서 불자들이 기거하는 방에 하루 묵을 때였다. 방이 하도 뜨거워 꼬박 밤을 새워버렸다. 잠을 못 이룬 덕에 세상의 그렇게 많은 별들을 보고 행복해한 기억이 난다. 잠을 못 이루고 아침에 부석사를 빠져나온 뒤 안동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나선 여행길이라 마음을 다지고 안동의 도산서원을 들른 뒤 하회탈박물관을 거쳐 하회마을로 들어섰다. 그때가 오후 5시쯤 되었을 것이다. 근처 서원 가운데 가장 빼어난 풍광을 안고 있다는 병산서원에 들르기 위해 먼저 숙박지를 골라야 했다.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떠날 심사였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4년 전의 하회마을엔 민박집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음식점 소개로 묵게 된 하회마을 입구 가까이 있는 집. 기억으론 칠순이 훨씬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었다. 젊은 날 곱고 예뻤을 할머니가 묵을 방을 안내하였다. 방은 너무 썰렁했다. 옛날 물건들을 한구석에 나란히 놓은 걸 할머니가 다락에 들여놓을 만큼 일종의 창고로 쓴 느낌이어서 선뜻 내키지는 않았으나, 다른 방은 이보다 작아 아쉬운 대로 결정하였다.

형광등 불빛도 흐려 책 읽다 자기엔 참 답답했다. 목욕탕도 간신히 미지근한 물이 나와 대충 씻은 기억이 난다. 그 방은 군불을 때므로 아랫목만 따뜻한 방이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쌓아놓은 나뭇가지와 장작에 불을 붙여 열심히 때는 모습을 보며 옛날 고향생각이 났다. 차츰 따뜻해오는 방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자니 문 밖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인기척에 마음이 쓰였다. 병들어 아파도 일을 하는 어머니 생각에 그 모든 낡은 것들이 사무치게, 정겹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선배, 빨리 자라, 난 책 좀 읽다 잘게.”

“나 오늘 잠 못 자면 내일 여행 망치는데….”

동행한 후배의 말에 나는 걱정스런 말투로 뇌까리며, 그냥 잠들어버렸다. 아침에 눈뜨니 6시였다. 한 10시간 잤나 보다. 여행 와서 그렇게 자본 경험이 없기에 너무 기분이 좋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카메라를 챙기고 후배랑 물안개가 가득해서 더욱 근사한 풍경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잠을 잘 자서 상쾌하니 사진도 잘 찍히고, 모든 게 가슴 벅차도록 기쁘게 스며왔다. 시야 가득 논과 강물이 들어찼다. 격정을 일으키며 다시 진정시키는 아늑하고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 그때 찍은 사진 가운데 한컷은 박물관 기행산문집 <시간 창고로 가는길>의 표지로 썼다. 사진 좋다는 얘길 들을 때마다 잠 푹 자게 해준 민박집이 고맙기만 하다. 검은 반점으로 물든 할머니의 손과 정성스런 밥과 찌개, 아궁이에 불을 때던 할머니의 약간 굽은 허리가 내 마음을 구부려 생의 겸허함을 부른다. 그 집의 이미지는 연약함·덧없음·희미함·간소함·담백함으로 펄럭인다. 바람 스칠 때마다 고요히 우는 문풍지처럼 그리운 그 무엇이다. 그 기억으로 풍요롭게 상상하며, 다시 가보고 싶은 그리움이 밀려든다.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