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원·양구=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옛길은 어디나 할 것 없이 사연을 담고 있다. 아이러니한 역사적 의미가 옛길의 원형에 남겨진 경우도 있다. 비무장지대에 남아 있는 50여 년 전 옛길도 그렇다. 분단이라는 진공상태가 과거 길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지게 했다.

△ 사태리를 넘어 보이는 비무장지대는 양구군 방산면 일대의 능선과 골짜기를 휘감으며 금강산으로 이어진다.

‘금강산 가는 길’은 우리에게 가장 신비로운 분위기로 남아 있다. 마치 꿈길과도 같은 길, 어린 시절 소풍 가는 길처럼 설레게 만드는 그런 길이다.

승리전망대에서 굽어보라

비무장지대를 지나서 금강산 가는 길을 굽이굽이 찾아가보면 10여 갈래가 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길이 철원 김화를 거쳐 가는 길, 화천의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는 길, 양구의 31번 국도길, 인제의 인북천을 따라 올라 백두대간 삼재령을 넘어 가는 길, 그리고 고성의 동해선 등이다. 이 중 동해선은 2002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이제는 금강산 육로관광객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다니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길들은 여전히 냉전시대 이상의 긴장 속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극단의 대치 속에 그대로 역사의 진공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두 갈래 길을 찾아가본다. 강원도의 철원 김화에 펼쳐져 있는 금강산선 철길과 양구군의 수입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31번 국도다.

철원군 김화읍에서 남대천을 따라 근동면을 지나가면 평강고원 옆을 휘어돌아 금강산으로 가는 철길이 있다. 전쟁 전 협궤열차의 대명사였던 ‘금강산선’이다. 철길과 평행선으로 놓여 있는 신작로는 서너 사람이 횡렬로 걷거나 소형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비포장도로다. 철길과 신작로 모두에서 옛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육군 백골부대에서도 옛길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두었다. 대인지뢰 탓이긴 하지만, 전쟁 전 길의 모습 그대로다.

금강산선의 아스라함은 봄부터 가을을 넘어 겨울까지 이어진다. 바람이 불면 옛 철도 노반의 갈대와 풀꽃들이 일렁거려서 마치 철길이 되살아나 금강산으로 춤을 추듯 흘러간다. 옛길의 절정은 철책선을 지키는 초병들의 고가초소 주변에서만 보인다. 백골부대와 인접 부대의 경계지역 근처다. 물론 철원 근남 마현리의 승리전망대에서도 금강산선 철길의 노반이 멀리서나마 뚜렷하게 관찰된다. 승리전망대 주변은 과거 금강산선 주변의 농지와 마을터, 송전탑 등 정전의 문화유산인 남대천 일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금강산 철길로 걸어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 도중에 나타나는 남대천 앞의 인도교는 끊어져 있다. 한국전쟁 직후 모습 그대로다.

철원은 비무장지대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지역 전체가 비무장지대다. 그래서 아직도 철원에는 남과 북이 빚어낸 다양한 모습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중에서도 비무장지대를 통해 펼쳐진 곳곳의 문화재와 문화유산들이 즐비하다. 그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곳이 철원평야에서 평강고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면 김화 쪽 남대천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떨어져 있던 곳이다. 최근 육군 승리부대의 승리전망대가 개방되면서 이 지역이 비로소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길의 전경이 승리부대 쪽에서 보인다면 구체적인 윤곽과 모습이 바로 들어오는 곳은 백골부대다. 하지만 부대 관계자들 중에서도 10년 이상 오래 근무한 군인이 아니면 정확한 장소를 알지 못한다.

수십 발 총탄 박힌 ‘서울 원산’ 이정표

백골부대 쪽 민통선 지역인 김화 생창리와 암정리 일대에도 옛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전쟁 때부터 서 있던 암정교를 비롯해 도로 표지석, 용양보의 옛 목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도로표지판은 ‘금화군’이라는 지역명과 함께 ‘서울, 원산’ ‘화천, 원산’ 등 이정표의 내용도 그대로 음각돼 남아 있다. 여기에 수십 발의 총탄이 박히거나 스쳐간 흔적은 이 지역이 격전지였음을 말해준다. 금강산선 철길과 신작로가 현재의 노반과 노폭 그대로 복원된다면 비무장지대 생태계가 고스란히 휘어감기는 꿈같은 철길이 될 것이다. 철도의 천국 일본이나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환상적인 철길로 되살아날 것이다.

양구의 금강산 가는 길은 국도 31번 노선인데 이 길은 일제시대 국도 모습 그대로다. 골짜기 전체에서 흘러내려 모이는 사태리 계곡을 거슬러 북으로 올라가는 길이 바로 금강산 가는 길이다. 육군 백두산부대의 태백전망대에서 비무장지대를 보면 드넓은 능선과 계곡을 이리저리 휘어감으며 북쪽으로 펼쳐진 파노라마가 나온다. 이 장엄한 풍광의 한가운데가 내금강 가는 길이다.

사태리로 이어지는 31번 국도 방향의 금강산 가는 길은 멧돼지가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거나, 고라니가 엉덩이를 실룩이며 걷다 놀다 가는 길이다. 차를 타고 다녀도 이 친구들을 쉽게 만나며 걸어서 가면 거의 빠짐없이 마주친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육이나 훈련용이 아닌, 오직 자연 그대로의 멧돼지와 고라니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했던 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다툼과 증오의 인간 역사가 빚어낸 동물들의 낙원이라 할 만하다. 온통 대인지뢰 지역이라 길이 난 곳을 빼고는 다닐 수 없다. 군인들도 보급로로 이어진 31번 국도 이외의 숲 속으로 일절 접근하지 않는다.

사태리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이 만나는 곳이 두타연이다. 일찍부터 비무장지대의 명소로 알려진 두타연은 천연기념물 열목어가 서식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두밀리에서 사태리로 이어지는 금강산 가는 길은 민통선과 비무장지대로 연결되는 길이라 곳곳에 군사시설물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것도 세월이 흘러 30년이 더 된 시설은 아련한 향수까지 불러일으킨다. 시설물에는 예외 없이 ○○○ 사단장, ○○○ 부대장 등의 이름과 함께 완공된 때의 날짜가 표시돼 있다. 더불어 기념비석에 쓰인 구호도 70년대의 시대 분위기를 말해준다.

도로 포장에는 후한 지자체 예산

31번 국도는 본래 부산에서 출발해 울산~포항~청송~영양~태백~평창~인제를 거쳐 양구로 이어진다. 부산에서 양구의 민통선 초소를 지나치는 방산면 두밀리 일대까지 전부 포장도로로 돼 있다. 길의 폭이나 형태나 전쟁 전의 금강산 가는 길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남아 있는 구간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일부 구간뿐이다. 이 길 역시 비무장지대를 뺀 민통선 길은 양구군에서 포장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벌써 두타연을 지나 사태리 입구까지 포장도로 공사를 위한 노반 다짐을 하고 있다. 그동안은 군에서만 관리했기 때문에 불편해도 그냥 비포장길로 썼다. 군에서는 보급로나 전술도로를 포장할 예산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요즘 지자체들은 다른 곳에는 몰라도 도로 포장에는 예산을 후하게 쓰는 것 같다. 낙후와 불균형이라는 주장이 무색할 정도다. 2차선 아스콘 도로는 기본이다. 이제 전국 어디에도 50년 전 국도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비무장지대를 넘어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 복원돼 야생동물이 뛰어노는 옛길, 과거의 잊혀져간 시간으로 안내하는 옛길이 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