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동아방송의 <앵무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라디오 시사꽁트 역사
박정희 땐 반공법 위반으로 작가 등 6명 구속… 5공 땐 ‘대머리’가 성역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한 가정집 수돗물에서 지렁이가 떼로 나왔다. 1970년 어느 토요일의 일이다. 당시 사회 부조리를 파헤쳐 고발하는 문화방송의 5분짜리 라디오 사회만평 프로그램 <오발탄>은 이 사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성우 오승룡(69)씨는 가정주부와 시민의 목소리를 섞어가며 이렇게 끝맺는다. “내일이 토요일이잖습니까. 서울시장님께서 내일 낚시 가는 분들을 위해 미끼로 쓰라고 수돗물에 지렁이를 내려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붕어까지 보내주시죠!”
지렁이가 가른 프로그램의 운명
애꿎게도 지렁이들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운명을 갈랐다. 같은 날이다. 동양방송의 <레이다640>도 지렁이 수돗물 사건을 다뤘다. 동양방송은 “소고기값이 비싸지 않습니까. 서울시에서 지렁이를 대신 넣어 고깃국을 끓여드시라고 시민들을 위해 수돗물에 지렁이를 넣은 것 같습니다”라고 풍자의 수위를 조금 높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다640>은 혐오감을 줬다는 이유로 문패를 내려야 했다. “그날치 방송사들의 라디오 녹화 테이프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가 됐답니다. 박 대통령은 <레이다640>을 들은 뒤 ‘아니, 어느 정부에서 지렁이를 넣어 고깃국을 끓여먹으라고 하겠냐’며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오발탄>을 듣고는 그냥 웃고 말았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죠. 당시 방송가엔 이같은 소문이 파다했어요.” 30년이 넘었지만 <오발탄>의 작가 윤천광(66)씨는 그때 그 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정권은 토룡(지렁이)탕이 보양식과 약용으로 널리 애용된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라디오의 시사콩트 역사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아방송사>(1990년 발간)에서 “시사 문제를 다루면서 정치적·사회적 부조리를 예리하게 추궁해서 인기를 모았다”고 밝힌 프로그램 <앵무새>는 동아방송의 1963년 10월1일 편성표에 10시55분부터 5분 동안 전파를 탔다고 기록돼 있다. <문화방송 30년사>(1992년 발간)에서 <오발탄>은 1963년 11월 프로그램 개편 때부터 첫 방송이 나갔다고 전한다. <앵무새>가 최초의 라디오 시사풍자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사회비판 기능을 오락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오발탄>이라는 게 방송계의 중평이다.
△ <싱글벙글쇼>(왼쪽)는 가장 오래된 시사콩트 프로그램이다. 1973년 시작되어 1984년 강석, 1986년 김혜영이 합류했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2002년에는 이 시간대에 <와와쇼>가 자리잡았다. 초기 진행자 김학도, 배칠수(왼쪽부터)는 2004년 배칠수, 전영미로 바뀌었다. (사진/ SBS 제공)
시사 쪽에 좀더 무게중심을 둔 <앵무새>는 1964년 10월1일 편성표에서부터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취지의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군부가 1964년 6월 방송작가 등 6명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해 4월 내각에 내린 ‘시정의 일대 혁신을 위한 훈령’에서 “오늘의 현실은 정부가 언론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주면서도 그 책임의 강조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앞으로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들에 대해 냉엄히 그 책임을 추궁하겠으며, 이는 정부에 부여된 임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라고 경고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노태우를 코미디 소재로 삼았지만…
군홧발 밑에서도 그나마 1960년대는 민방을 중심으로 한 시사콩트의 황금기였다. 기독교방송의 <장군멍군>도 196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시사콩트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당시 사회풍자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풍자로 살짝 포장한 고발성의 특징을 띠었다. 언론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던 때, 나름대로 숨구멍 역할을 한 측면도 크다. 프로그램의 길이는 5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다. 성우가 나와 여러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방식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72년 유신체제가 출범하면서 군사독재의 강화는 시사콩트의 역사에서도 암흑이자 단절의 시기였다. 그해부터 방송 내용에 구체적인 규제가 가해졌다. 프로그램 주제 설정에서 국민정서나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는 것은 극력히 피하도록 했다. 윤천광씨는 “유신을 선포한 뒤 보도국에서 계속할 자신이 있냐고 물어왔는데, 조금만 비틀어 방송해도 사회불안 조성으로 잡혀 들어갈 듯한 분위기에서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도 중앙정보부에서 방송국에 파견된 요원으로부터 “당신 말이야, 아슬아슬해. 20분이면 잡아들일 수 있다”는 등의 협박을 수시로 받았다고 한다. 보도지침도 늘상 내려왔다.
전두환 정권 때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정치인을 코미디 소재로 다룰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대머리나 순자 이름은 언론에서 성역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있고 나서야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1969년 가요코미디물로 출발한 <유공쇼>에서 <코끼리쇼>란 이름을 거쳐 1973년부터 지금까지 문패를 유지해오고 있는 문화방송의 <싱글벙글쇼>에서 다시 시사콩트의 싹이 텄다. ‘돌도사’가 그 대표적인 코너였다. 같은 방송사의 FM 라디오 프로그램인 <가요응접실>에서 개그맨 최병서씨와 그의 형이자 작가인 최명길씨가 콤비를 이룬 ‘따따부따’와 ‘병팔이 일기’란 코너가 있었다. 최병서씨는 이 프로그램들을 통해 최초로 ‘3김’을 흉내내면서 정치인의 캐릭터를 코미디의 영역으로 불러왔다는 평가도 받는다. 라디오에선 6개월 만에 막을 내린 ‘병팔이 일기’는 텔레비전으로 무대를 옮겨 크게 유행했으며, 책으로 엮여 10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 동아방송의 사회 부조리 고발 프로그램인 <앵무새>의 담당 PD와 작가 등 여섯 명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진/ 동아방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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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치코미디의 중흥은 노태우가 대선 공약으로 “나, 보통사람을 코디미의 소재로 삼아도 좋습니다”라고 선언하면서 불붙었다. 1990년엔 교통방송이 개국하면서 <9595쇼>가 정치와 시사를 풍자하는 코너를 계속 운영해왔다. ‘대비마마 듭시오’ ‘X공화국’ 등 20여 개의 정치 시사콩트가 프로그램 안에서 맥을 이어왔다. 그렇다고 노태우 정권 뒤부터 온전히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최명길 작가는 “정치인을 끄집어내서 패러디를 할 때엔 이렇게 들으면 정치적으로 들리고, 저렇게 들으면 아닌 것 같게끔 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놔야 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어디라고 밝힐 순 없지만, 암암리에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고발과 비판 줄면서 유머 코드로
2002년엔 문화방송과 SBS에서 두 개의 프로가 거의 동시에 나왔다. 문화방송의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가 한낮 시간대에 <싱글벙글쇼>와 경쟁을 벌이게 된 SBS의 <배칠수, 전영미의 와와쇼>보다 1~2주 먼저 방송 전파를 탔다. <배칠수, 전영미의 와와쇼>에서는 ‘격동 5학년’ 등이 대표적인 정치 콩트로 소개할 만하다.
1990년대 이후 확대되기 시작한 언론의 자유는 1960년대 황금기를 누린 시사콩트의 내용과 형식에도 계속된 변화를 가져왔다. 고발과 비판의 몫이 줄어들면서 웃음이 많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독립된 짧은 코너 형태에서 1~2시간 동안 개그맨들이 병렬로 이어진 다양한 코너를 끌고 간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불변한 법칙도 있다. 웃음과 함께 삶에 지친 서민들의 가려운 등을 후련하게 긁어주겠다는 방향에 고정된 나침반 바늘은 여전히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