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특집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8월25일 제524호
‘확전’은 나홀로 결단

당직자 의견 듣지 않고 포문 연 박근혜 대표… 인터넷이 그의 귀를 잡고 있을까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과거사 전쟁’은 8월19일 박근혜 대표가 ‘친북·용공으로 조사대상 확대’ 맞불을 놓으면서 확전되는 양상이다. 박 대표는 이날 상임운영위원회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던 냉전 시기에 누가 국가안보를 지켜내고 위협했는지,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은 누구인지 이 기회에 공정하게 규명해보자”고 밝혔다. 노 대통령의 과거사 특위 제안에 “국민 분열”을 이유로 사실상 거부했던 데서 불과 나흘 만에 방향을 크게 선회한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의사결정 과정이다. 7월19일 대표 취임 이후 20여일을 이끌었던 국가 정체성 공방의 시발점도 그랬지만 이번 과거사 확전 과정 역시, 박 대표의 ‘나홀로 결단’ 성격이 짙다. 박 대표의 제안은 회의 첫머리에 나왔다. 본격적인 회의에 앞서 기자들에게 공개되는 ‘오프닝 멘트’였다. 다른 주요 당직자들이 보고를 겸해 논란이 되고 있는 현안을 가지고 노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을 비판하면 이를 종합해 마무리하는 방식을 선호했던 박 대표는 이날 평소와는 달랐다. “오늘은 제가 먼저 말씀드리죠”로 시작해 미리 준비한 보따리를 풀어놨다. 7월19일 대표 취임 이후 20여일간 벌어졌던 국가 정체성 공방의 포문을 열었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다른 당직자들의 얘기를 주로 듣는 편이지만, 중요한 순간이라고 판단하면 작심을 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국면을 끌어가는 스타일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얼굴’(박 대표)이 먼저 돌아가고 큰 ‘덩치’(한나라당)가 뒤늦게 쫓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박 대표의 과거사 조사 확대 제안을 미리 알고 있었던 당내 인사는 여의도연구소 임원진(소장 박세일·부소장 박형준 의원) 등 일부 주변인사들에 불과했다. 김덕룡 원내대표나 김형오 사무총장은 회의 직전 박 대표와의 티타임에서 ‘결단’을 미리 들은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당내에서조차 “누가 박 대표의 귀를 잡고 있느냐”는 말이 돌고 있는 실정이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박 대표의 발언 전부터 실무자부터 핵심 당직자들까지 ‘친북·용공으로 맞불을 놓자’는 아이디어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만큼 마지막 단계에서 박 대표의 결단을 누가 이끌어냈는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에 광범위하게 퍼진 친북·용공 맞불 작전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월간조선> 조갑제 발행인으로 추정된다. 극우보수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고 있는 조씨는 8월15일 노무현 대통령의 경축사 직후 자신의 사이트에 “친일 진상 규명보다 더 급한 것은 친북 규명이다. 친일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지하에 묻혀 있다. (중략) 친북(정권)은 현재 진행형이다. 친일보다 더 악질적이고 위험한 것이 친북이며 이는 친일보다 더 위험한 민족 반역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조씨의 주장은 여러 변종으로 ‘조갑제 사이트’류의 다른 곳과 박근혜 팬클럽 등에 등장했다.

박 대표는 평소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일찍 귀가해 하루 1시간씩 인터넷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미니홈페이지가 있는 싸이월드와 팬클럽 사이트에서 박 대표는 측근들을 거치지 않은 생생한 여론을 청취한다는 것이다. 조갑제 발행인으로부터 시작해 친한나라당 성향의 사이트로 번진 ‘친북맞불론’은, 과거사 규명을 마냥 거부하기만은 곤란한 박 대표에게 불가피한 대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터넷이 박근혜 대표의 귀를 잡고 있는 최측근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