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특집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6월09일 제513호
중소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

‘표준원가지표’ 개발 등 납품단가 처방 절실… 우량기업만 혜택받는 자금지원 구조도 개선해야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5월 중소기업인들과의 간담회에서 “중소기업은 2만달러 시대를 향한 기술혁신과 일자리 창출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만큼 경제발전 전략도 중소기업 중심으로 가야 한다”며 “정부는 중소기업을 가장 중요한 정책 파트너로 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중소기업인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중소기업 애로사항? 우리가 백날 떠들어봤자 입만 아프다. 도대체 바뀌는 것이 있나?”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한 자동차 부품업체의 이사인 ㄱ씨는 “중소기업 정책자금 수천억원을 푼다고 해도 은행에 가면 담보 내놓아라, 과거에 돈 받았으니 안 된다고 퇴짜 놓는다”며 “담보가 있다면 벌써 돈 빌려 썼지, 왜 자금난을 호소하겠냐”고 되물었다.


△ “본질적인 문제를 덮어두기 위한 처방에서 이제는 하나씩 풀어가는 정책으로 바뀌어야 한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김용구 회장 등 중소기업 대표 20명과 노무현 대통령간의 간담회.(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관련법과 정책은 수없이 많지만…

사실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중소기업 정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나라 헌법은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고, 중소기업 구조개선 및 경영안정 지원을 위한 특별법, 중소기업 진흥 및 제품구매 촉진에 관한법률 등 수많은 중소기업 관련법이 마련돼 있다. 2002년의 경우 11개 중앙부처에서 운용하는 중소기업 정책자금 규모만 6조원이고 신용보증까지 합치면 7조원에 이른다. 여기에다 각종 조세특례·세액공제가 있고 지방자치단체도 저마다 중소기업 육성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산업연구원 주현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처럼 각종 중소기업 정책상품이 백화점처럼 다 갖춰져 있는 국가도 드물다”며 “정부가 새로운 대책도 계속 쏟아지고 옛날 대책까지도 새로 윤색하고 멋있게 튀겨서 다시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제도와 정책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데 왜 중소기업은 늘 죽겠다고 아우성일까? 산업연구원 조영삼 연구위원은 “그동안의 정책은 중소기업 사장이 자살하면 물량을 쏟아붓는 식의 단기 땜질 처방이었다”고 말한다. “중소기업의 본질적인 문제를 덮어두기 위한 처방에서 이제는 하나씩 풀어가는 정책으로 바뀌어야 한다.” 중소기업의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효율성의 싹을 뿌리부터 갉아먹는 불공정 거래부터 고쳐야 한다는 얘기다. 먼저 ‘공정 거래’라는 측면에서 중소기업의 애로를 살펴야 한다는 것인데, 대기업과 거래를 터서 먹고사는 게 중소기업인 만큼 고질적인 납품단가 인하에 대한 처방부터 내놓아야 한다.

현행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은 정당한 이유 없이 일률적인 비율로 단가를 인하할 수 없고, 협조요청·경제환경 변동 등 불합리한 이유를 들어 하도급 대금을 감액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하도급법은 선언에 불과할 뿐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장윤성 과장은 “정부가 하도급 거래 실태조사를 나가면 일부 대기업이 중소 부품업체한테 ‘내용을 왜곡해 기재하거나 조사에 응하지 말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현실적인 힘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공정거래법을 잘 만들어놓아도 납품단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납품 계약은 기업간의 대등한 계약이라는 외양을 띠기 때문에 대기업이 스스로 개선해 호혜적 협력관계로 바꿀 유인은 전혀 없다. 따라서 그동안 중소기업이 잡초처럼 버텨왔지만, 계속 내버려둘 경우 사회적 통합이 붕괴될 때까지 불공정 거래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중소기업 대란설까지 흉흉하게 나돌고 2~3년 단위로 끊임없이 자금난이 반복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납품단가 인하도 한몫 거들고 있다. 어느 정도 경쟁력과 사업성을 갖춘 중소기업조차 해마다 되풀이되는 납품단가 인하 때문에 수익성이 갈수록 악화돼 결국 자금 압박에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수 부진에 원자재값 폭등까지 겹치면서 중소기업은 벼랑 끝에 몰렸고, 2∼3년 안에 죽을 날만 기다리는 기업도 상당수다. 특히 내수 부진은 납품단가 인하에 따라 수많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소득이 낮아진 탓도 크다.

‘부당한 단가 인하 요구’ 대기업 공개를

중소기업들이 잇따라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도 불공정 거래와 무관하지 않다. 인천 남동공단의 중소업체 이사인 ㄱ씨는 “주변 중소기업을 보면 모기업이 만날 단가 인하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종업원 인건비 줄이고 사람 잘라서 감당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다”며 “인건비 싼 중국으로 탈출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올 들어 중소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4월 말까지 620건, 6억800만달러로 같은 기간에 이뤄진 대기업의 해외투자 규모에 거의 육박한다.

납품단가 횡포를 막기 위한 처방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부품별 적정원가를 제시한 ‘표준원가지표’를 만들어 외부에 공표하거나 ‘표준계약서’를 산업별·업종별로 세분화해 준비한 뒤 장기 계약할 때 사용을 의무화할 수 있다. 그러면 중소기업의 적정이윤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 또 대기업의 부당한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발각될 경우 일반에 공개해 그 기업의 상표가치를 떨어뜨리는 방법도 있다. 이 밖에 대기업 사외이사 2, 3명 자리에 중소 협력업체 대표를 참여시키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6월3일 공정거래위원회와 열린우리당은 대기업의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를 막기 위해 주요 원사업자와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연도별 임금과 완제품가격, 납품단가 상승률을 비교 평가해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 하도급기획과 유희상 과장은 “표준원가는 산정할 수가 없다. 다만 원재료값이 5% 올랐는데 납품 단가는 6% 내렸다면 대기업이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간접 견제하는 효과를 낼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공정 거래 관행이 중소기업의 숨통을 죄고 있지만, 정부가 개입해 직접 칼을 빼들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 은행의 기업대출 상담. 정작 돈에 목이 타는 급한 중소기업들은 돈 빌릴 데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사진/ 박승화 기자)

그렇다면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은 어떤가? 산업연구원 주현 연구위원은 “각 중앙부처가 자체 예산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중소기업 정책자금을 부풀려 제시하면 기획예산처는 오히려 더 써라고 말할 정도로 돈은 넘쳐난다”며 “그러나 이 돈이 필요한 곳으로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굳이 정부 돈을 타쓰지 않아도 되는 우량 중소기업들만 정책자금을 끌어다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달체계 왜곡은 정책자금을 빌려주는 창구인 은행에서 비롯되고 있다. 산업연구원 조영삼 연구위원은 “은행의 중소기업 금융은 전당포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신용평가 시스템에 의한 기업 선별기능은 전혀 못한 채 그저 편하게 담보대출만 하고 당장의 현금 유동성만 따져보고 대출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고객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즉 기술력과 시장성 등은 뒷전이고 담보력이나 이자보상비율(영업이익으로 금융비용을 갚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지표)만 보고 대출해주는 ‘안전빵’ 대출만 해주고 있다는 얘기다.

주5일제 시행에서도 소외

그러다 보니 유망 중소기업에만 정책자금이 몰리고 정작 돈에 목이 타는 중소기업들은 돈 빌릴 데가 없다. 은행들은 “수익성이 뛰어나고 수출까지 잘되면 그때 가서 자금지원을 검토해보겠다”고 말하지만, 그런 유망 중소기업이 나중에 은행에 손을 벌릴 이유는 없다.

자본과 인적자원을 모두 대기업이 독점하는 경제구조에서 중소기업의 미래는 없다. 이제 돈과 사람이 중소기업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외환위기 직후 ‘중소 벤처신화’가 퍼지면서 중소기업에 가서 한번 도전해보겠다는 분위기도 형성됐지만 ‘한때’에 그치고 말았다. 산업연구원 조영삼 연구위원은 “주5일제마저 중소기업은 시행 시기가 한참 뒤로 밀려나 있는데, 이럴 경우 중소기업에 가려는 사람이 더 줄어 인력난을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주5일제마저 배제된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두 쌍두마차’가 이끄는 한국경제 비전은 암울하기만 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