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안 의결 뒤 국회 시정연설 추진 · 각료 제청 불가 문건 유출 등 대권 노림수 아닌가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대통령 권한대행 63일간 권한대행은 권한대행일 뿐이라며 몸을 낮추고 묵묵히 본분에 충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이 무리하게 각료 제청권 행사를 요구하자 헌법정신 수호를 내세우며 분연히 항거….’ 고건 전 국무총리가 현 시점에서 쌓은 이미지는 대충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진실의 전부일까.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지난 3월12일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은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한 직후 여세를 몰아 임시국회 소집을 추진하면서 고건 권한대행의 국회 시정연설을 요구했다. 야3당은 ‘탄핵 의결 이후 국정안정이 긴요하다’ ‘따라서 고건 대행 중심의 내각에 협력하겠으니 고 대행의 국정관리 구상을 설명해달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이런 제안에 ‘고건 띄우기’를 통한 탄핵 합리화의 코드가 숨어 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즉, 노 대통령이 사라져도 국정에 문제가 없고, 오히려 정부가 더 잘 굴러간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자는 계산이었다. 고 대행을 부추겨 노 대통령과 틈새를 벌려놓자는 전략이었던 셈이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제안’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핵심 관계자들에 따르면 고 대행은 당시 야당의 제안을 받아들여 임시국회 시정연설을 한때 추진했다고 한다. 이어 국회쪽과 연설 일정을 잡도록 지시해, 실제로 권한대행 비서실과 국회간 협의가 오갔다는 것이다.
이에 열린우리당에서는 “고 대행이 그럴 수가…” “그가 다른 마음을 먹은 건 아닌지…”라는 반응들이 나왔다. 이어 총리실쪽의 일정 협의에 응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정리했다.
이 문제는 결국 고건 권한대행쪽이 “여야 각 당이 합의하는 것을 전제로 국회에 출석하겠다”고 발표함에 따라 일단락됐다. 열린우리당이 반대하는 점을 들어 국회 시정연설을 하지 않는 쪽으로 정리된 것이다.
고 대행이 시정연설을 희망한 점, 그리고 국회와 일정 협의까지 벌인 대목 등은 당시 일체 보안에 부쳐졌다. 그러나 ‘사정을 알 만한’ 여권 인사들 사이에선 고 총리의 진의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다.
4·15 총선이 끝난 뒤 북한 용천역 폭발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비슷한 사단이 벌어졌다. 고 대행은 용천역 사고에 관한 지원대책을 협의할 필요가 있다면서 자신이 주재하는 정당 대표자 회담 아이디어를 냈다. 이에 따라 비서실은 각 정당을 상대로 의사 타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이 제안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금만 지나면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노 대통령의 직무복귀가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고 대행이 왜 나서는지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또 며칠 뒤로 잡힌 정동영 의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회담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터인데, 그 직전에 각 당 대표회담을 한다는 게 탐탁지 않기도 했다. 그 결과 고 대행은 각 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정부 지원대책을 설명하고 통일부 장관을 보낼 터이니 그 기회에 의견을 달라고 하는 선으로 물러섰다.
5월26일에는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각료 제청권 행사 불가, 각계 의견’ 문건이 <조선일보>에 보도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고 전 총리쪽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문건을 흘려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인상이 뚜렷했다. 고 전 총리의 이미지는 높이되, 노 대통령을 한 주먹 쥐어박는 효과를 낳을 행동이었다. 이에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사석에서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런 일들이 고 대행 나름의 ‘스타일리스트 기질’의 발로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는 고 전 총리가 2007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이미지를 쌓으려 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어쨌든 고 전 총리의 행보도 ‘100% 순수’만은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