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어가는 뇌물수수 풍경… 제3자 이름으로 통장 만든 뒤 도장 넘겨주는 수법도
뇌물과 같은 ‘검은 돈’의 거래에서 수표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부피와 무게를 줄일 수는 있지만 ‘흔적’이 남는다.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가장 고전적이면서 안전한 수단은 역시 현금이다. 꼬리표가 없으니, 그 자체로 추적당할 염려는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액수가 많아지면 부피와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금융기관에서 몇천만원, 또는 몇억원을 찾으면 신고대상이 될 수 있다. 마대나 사과상자 등에 넣을 수밖에 없어 주고받을 때 ‘품위’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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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뇌물수수엔 가벼운 달러를 사용하세요? 사진은 원화 1억원과 100달러 지폐 1000장(1억2천여만원)을 비교해서 모은 모습.(김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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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경변화 탓인지 기발한 수법들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달러(미화)로 주고받는 것이다.
최근에 끝난 나라종금 사건에서 이용근(62)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두번에 걸쳐 100달러짜리 지폐 150장, 1만5천달러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김홍일 의원의 최측근 정학모(61·LG스포츠 고문)씨도 나라종금 등에서 8번에 걸쳐 6만5천달러를 받았다. 지난 5월 수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손영래 전 국세청장도 수뢰액 가운데 1200만원이 100달러 지폐 100장이었다.
한 수사 관계자는 “이들이 한번 받을 때 최대 액수는 1만5천달러였는데, 그래 봤자 150장이니까 편지봉투 하나에 너끈히 들어가는 정도”라고 전했다.
이처럼 100달러 지폐가 신종수법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까닭은 크기가 작고 부피 또한 적기 때문이다. 문효남 대검 수사기획관은 “100달러짜리로는 1억원이라고 해도 두툼한 책 한권 두께밖에 안 된다”며 “우리 돈 1만원권으로 1억원을 주려면 따로 짐꾼이 필요할 정도니까. 그래서 애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고급양주인 ‘로얄 살루트’ 상자 하나에 100달러 지폐로 1억원이 들어간다는 설도 있다. 또다른 관계자는 “달러도 현금이라 암달러상 등에서 환전하면 흔적이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3자 이름으로 통장을 만든 뒤 도장과 비밀번호를 넘겨주는 수법도 비교적 자주 쓰인다. 준 쪽과 받은 쪽의 관계가 노출될 확률이 지극히 낮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받은 쪽은 예금액을 1~2차례에 걸쳐 모두 찾고 통장을 폐기하는 사례가 대부분”(한 검사)이라고 한다. 금융기관에서 비밀번호만 알면 신원확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는 유종근 전 전북지사다. 유씨는 지난 1997~98년 세풍월드쪽에서 건넨 3억원 가운데 1억5천만원을 통장으로 받았다. 세풍쪽은 제3자 명의로 개설된 계좌에 그 돈을 입금한 뒤 통장을 유씨에게 전달했고, 유씨는 현금으로 찾아썼다.
주식을 액면가 또는 그 이하에 넘겨준 뒤 이를 팔아 이득을 얻게 하는 ‘주식로비’, 청탁하는 당사자가 제3자에게 이익을 주도록 한 뒤 청탁을 받는 쪽이 그 제3자한테서 뇌물을 받는 ‘우회수뢰’도 등장하고 있다.
또 최근 대북송금 특검수사에서 일부 드러난 것처럼 아주 큰 돈은 양도성예금증서(CD)나 무기명 채권 등이 동원되기도 한다. 액면가가 커서 전달은 쉽지만, 현금화 단계에서 신원이 남는 위험부담이 있는 탓에 직접적 뇌물수수보다는 비자금을 세탁하는 중간 단계에서 많이 활용된다.
강희철·김태규 기자 / 한겨레 사회부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