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정전 50돌, 세계의 시를 통해 본 전쟁과 평화의 메시지
7월27일로 한국전쟁 정전 50돌. 그러나 전쟁은 여전히 불안으로 남아 있다. 이 불안을 씻기 위한 무기로, 시는 어떠한가. 영문학 사상 최고의 반전시인 윌프레드 오언에서 타데우즈 로제비츠까지, 세계의 시로 본 전쟁과 평화의 메시지.
|
7월27일로 한국전쟁 정전 50주년을 맞이한다. 종전은 축하할 사실이지만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전쟁은 여전히 존재하는 불안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종전을 기념하는 이유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기 위해서다. 그 다짐에 가장 합당한 일은 평화를 노래하는 게 아니겠는가.
평화의 시는 역설적이게도 전쟁에 대한 시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평화를 깨뜨리면서 일어나고 평화는 전쟁을 극복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과 그 비극을 이야기해주는 전쟁시야말로 평화의 메시지, 바로 그것이다.
전쟁 찬양, 그리고 전쟁에의 질문
하지만 전쟁시의 의미는 처음부터 ‘자비나 동정’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영국의 계관시인 앤드류 모션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전쟁시인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전 세월에도 시인들은 전쟁에 대한 시를 써왔지만 그들의 시적 소재나 주제는 전쟁에 대한 찬양 일변도였다. 그리스나 로마 시대 당시의 시인들은 전쟁을 국가의 승리, 그리고 전사의 용기와 지도자의 용맹함으로 상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얼마간 ‘무공’에 대한 잠재적 예찬이 본능적으로 깔려 있다고 말하면 틀린 것일까? 예를 들어 영국의 시를 얘기할 때 가장 윗대 조상으로 꼽히는 베어울프도 전쟁은 생존과 명예를 위한 투쟁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노래했다. 셰익스피어도 전쟁을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위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힘을 다지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그렸다.
‘평화로울 땐 겸손하고 조심스런 게 남자다움이지만 전쟁의 포성이 귓전을 때릴 때는 맹호의 동작을 닮아, 전쟁에 단련된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은, 그 태생에 부끄럽지 않은 사나이’(헨리 5세)가 되라며 셰익스피어는 작품 속 전사들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들의 예민한 감수성은 결국 전쟁의 참혹함에 눈감을 수 없었다. 초서나 콜리지, 휘트먼과 같은 대시인들의 시에서 전쟁은 공포와 두려움, 절망, 슬픔의 단어로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주조는 그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국가를 예찬하고 전쟁의 목적을 고귀한 것으로 숭상하는 태도는 여전했던 것이다.
사진/ CENTURY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전쟁시의 의미는 달라졌다. 영웅이 사라지고 승리의 벅찬 감흥도 없어졌다. 나약한 한 여인이 언덕에 앉아 전사한 연인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는 가버렸어요. 이제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계획도 정말이지 소용없게 된 거지요’(이보르 거니의 ‘사랑하는 그대에게’ 중에서). 이런 변화는 물론 저절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전쟁을 노래할 때 관행처럼 되어 있던 영광이니 영웅, 그 모든 전통을 과감히 깨부순 당대의 시인들은 윌프레드 오웬(상자기사 참조), 이보르 거니, 지그프리드 사순, 그리고 아이삭 로젠버그와 같은 이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목격한 이들에게 영웅적인 전쟁시는 위선과 거짓의 노래였을 뿐이었다. 누구를 위해 젊은이들은 죽어갔나? 전쟁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었던가? 전쟁시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이러한 ‘전쟁에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시인의 눈길은 과거 전장의 마르지 않은 무덤에 묻혀 결코 눈에 띄지 않았던 어린 병사에게까지 맞춰졌다.
‘내가 알던 어린 병사는 순진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지. 외로운 어둠 속에서도 잠을 잘 자고 아침이면 종달새 소리에 맞춰 깨어나던 그 어린병사’는 전투에서 죽지 못했다. 전장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참호 속에서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고 자신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을 시작한 위정자들은 뒤쪽에서 팔짱을 낀 채 목청껏 외쳐댔다. ‘조국을 위하여’라는 미명으로 젊은이들은 전선으로 내몰렸다. 시인은 절규한다. ‘군대 행진에 환호하는 젊은 그대여, 그 지옥을 알지 못하게 집안으로 들어가 기도나 드리게’(지그프리드 사순의 ‘참호 속의 자살’ 중에서).
내 동생에게 죽임 당한 첫사랑이여
사진/ 체첸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정부군에 맞서기 위해 청년들은 떠나고 여성들만 남은 난민촌.(SYGMA)
‘증오는 도처에 깔려 있다’(켈리 그리피스). 그래서 분쟁과 갈등은 연일 터지고 그 사이에서 무고한 죽음은 행렬을 이었다.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했던가. 전쟁시는 지역을 넘어서 세계 도처 전쟁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가슴 저미게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캄보디아, 걸프전, 아일랜드 사태, 아프카니스탄…. 분쟁의 대상도 분쟁의 원인도 다르지만 전쟁의 참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전쟁시는 보여준다.
민족분쟁이 이어지는 아일랜드에서는 ‘내 동생에게 죽임 당한 내 첫사랑의 무덤’이 있다. 아랍지역 어디선가 학살을 목격한 자는 ‘이슬방울이 무기가 되는 것도 보았다’며 전쟁의 공포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인간을 괴롭히고 능멸하고 있음을 전쟁시에서 놓치지 않고 고발한다. 베트남 전쟁터의 한 군인은 지뢰가 말할 수 없이 두렵고 무서웠다. 언제고 불쑥 자신의 허리 높이로 솟아올라 몸을 두 동강 낼 것 같아 그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저기 방금 잘린 다리가 보인다. 누군가 소리친다. 내 눈을 가져가, 내 심장도 가져가…’ 지뢰를 밟아 사지가 잘린 전우가 자신의 장기를 이식해가라고 절규한다. 베트남에서는 너무 흔해서 별 충격도 주지 않는 광경이 아니었던가. 사라예보의 거리에는 보스니아 사람, 혹은 그 반대쪽의 사람인지 인종청소의 희생자로 총살당해 그의 피가 흥건히 거리를 적시고 있다. 바람에 날려온 신문지가 그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겨드랑이에 빵을 낀 채 지나쳐 갔다. 강에는 한 여인의 주검이 둥둥 떠가고 있었다. 다리 위를 지나가면서 나는 그 여인의 팔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고란 시믹의 ‘사라예보의 슬픔’ 중에서). 먹을 빵을 꿰차고 죽은 이의 팔목시계를 힐끗거리는 살아남은 자의 모습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것이다.
사진/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촛불처럼 시도 평화를 향한 강한 연대의 무기가 될 수 있다.(한겨레 김종수 기자)
종은 그대를 위해서 울리니…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던 날, 누구는 쇼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코소보에서 총격전으로 시민들이 죽어갈 때 다른 땅에 사는 누군가는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먼지만 날리는 사막에서 아프가니스탄의 한 여인이 부르카 안에서 끊어지듯 절규하던 그 날, 또 다른 쪽에 사는 누군가는 햇빛 아래에서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과연 그들만의 고통일까? 시인은 묻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나서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었지. 그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시인은 대답한다.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마틴 니에몰러 목사의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 중에서). 전쟁을 이야기해주는 시는 평화를 일구어내야 하는 책임은 결국 우리의 연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사진/ 비극의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에 희생당한 가족을 찾는 크림반도 주민들.(CENTURY)
위기의 순간에 우리의 감정을 가장 강하고 진실되게 반영해주는 시는 시간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수십년 전 혹은 수백년 전 전쟁 속의 고통을 그려놓은 시는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간격 없이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9·11 사태가 터졌을 때 그들은 무슨 말을 했을지,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시를 읽어보자. ‘기독교도 아니야, 유대인도 아니고, 무슬림도 아니고, 힌두, 불교, 수피 혹은 선 그 어느 종교도, 문화적 화법도 아니야, 나는 사랑하는 이들 모두에게 속해 있지’. 시, 그 안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힘이 있다. 인간의 고통을 꿰뚫어볼 줄 아는 시인의 혜안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영원토록 살아 숨쉬는 것 같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시를, 평화시를 읽는 연유다.
시는 또한 우리 모두를 하나로 이어주는 강한 연대로 작용한다. ‘이 시를 당신의 손 위에 올려놓고 읽어보시라. 당신이 이 시를 읽으며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면’(앤드류 다톤의 ‘종이비행기’ 중에서), 그 하늘 다른 쪽의 난민 캠프에 사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시인은 강조한다. 시는 인류애에 호소하는 가장 보편적인 말인 것이다. 아니, 말이 아니라 숨쉬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영웅이 되기를 원하는 군인은 사실 아무도 없다’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구처럼 누구도 전쟁을 용인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의 잔인함에 동의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전장이 내 땅이 아니니 다행이라 여기는 이도 없을 것이다. 다른 이의 평화는 바로 나의 평화가 아닌가. 우리는 그 사실을 다음의 연대에서 읽어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러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서 울리니’(존 던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에서).
권은정 | 자유기고가
고귀한 영예
윌프레드 오언(1893-1918)
부대를 든 늙은 거지처럼, 새우처럼 웅크리고 안짱다리로, 노파처럼 쿨룩거리며, 진창을 걸으면서 저주를 해댄다. 조명탄이 터지면 등을 돌리고 저 멀리 전투병 휴게막사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병사들은 졸면서 행진한다, 군화도 없이 그래도 절룩거리면 걷는다, 피를 흘리면서, 모두가 절름발이, 모두가 소경 기진맥진해서 포성조차 들리지 않고 5·9구경탄도 미치지 않는 곳으로 벗어난 듯하다.
독가스! 독가스! 빨리 움직여! - 후다닥 몸을 제치고 간신히 낡은 가스 마스크를 쓴다. 그러나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친다. 불에 탄 사람처럼 발버둥치며…. 마스크 안경 너머 뿌옇게 보이는 짙은 녹색 빛 녹색바다 속에서 그가 빠져 죽는 것을 본다. 꿈결처럼, 내 무기력한 눈앞에서 그는 내게 다가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꼬꾸라진다.
만일 불타는 꿈 속에서 그가 실려가는 마차 뒤를 따라 걸을 수 있다면 그 얼굴의 고통에 찬 흰 눈자위를 볼 수 있다면 죄진 악마처럼 늘어뜨린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독가스 찬 폐에서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는 피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순결한 혀에 돋는 씻을 수 없는 상처 같이 암처럼 흉측하고, 새김질로 입가에 토해놓은 걸 볼 수 있다면 친구여, 영광의 이야기를 졸라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진심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못할 테지. 그 오래된 거짓말을 말일세. “조국을 위해 몸 바치는 것은 고귀한 영예”라고.
-----------------------------------------------------------------------------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데니스 레버토프(1923~1997)/ 영국 출신 시인·미국에서 활동
1. 베트남, 그 나라 사람들은 석등을 켜던가요? 2. 꽃들이 막 피어날 때 그 사람들도 함께 모여 잔치를 벌이나요? 3. 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미소지으며 웃는 사람들인가요? 4. 그 사람들은 뼈나 상아, 옥이나 은으로 장식품을 만들어 달고 다니나요? 5. 그들도 옛 시를 읊나요? 6. 그 사람들은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이 크게 다르나요? 1. 선생님, 그들의 밝은 가슴은 이제 돌로 변해버렸습니다. 정원에 석등이 얼마나 기쁜 빛으로 비추는지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2. 아마도 꽃필 즈음이면 한번은 모이겠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죽은 후에는 터져 피어날 꽃봉오리들이 없답니다. 3. 그런데요, 불에 타버린 입으로 미소지을 때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4. 아마 오래 전 옛날에는 그랬을테지요. 장식이란 기쁠 때 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제 모든 뼈들은 검게 탄 숯덩이가 되어버렸지요. 5. 이제는 기억나지 않아요. 농부들은 거의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들이 벼를 추수하고 대나무를 벨 때는요. 한가로운 구름이 논바닥 물 위에 어른거리고 물소는 성실하게 걸음을 옮기며 쟁기질을 할 때 그때는 아마 아버지가 아들에게 옛 얘기를 들려주었겠지요. 그러나 폭탄이 그 논바닥물 거울에 내리쳐 박혔을 때 그들은 비명조차 지를 틈이 없었지요. 6. 아직 메아리는 있지요. 마치 노래와 같았던 그들의 말소리를 담은 메아리요. 그 노랫소리는 달빛 아래 펄럭이는 나방의 날갯짓 소리와 닮았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자 누가 있겠어요. 이제는 적막만이 감도는데.
-----------------------------------------------------------------------------
생존자
타데우즈 로제비츠(1921~ )/ 폴란드 시인
나는 끌려가 학살당한 24명 중의 한 사람 나는 살아남았다
다음의 말들은 공허한 동의어일 뿐 인간과 금수 사랑과 증오 동지와 적 어둠과 빛 인간이 죽이는 방법과 동물이 죽이는 방법은 똑같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결코 살아남지 못할 인간들이 토막난 채 이 트럭에 가득했다. 개념은 단순한 말일 뿐이지 선과 범죄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 용기와 비겁 선과 범죄도 무게가 같지 내가 그것을 봤다니까 그 안에 착함과 선함이 동시에 들어 있는 한 인간을. 나는 선생이나 장인을 찾고 있지 그라면 나의 눈과 귀와 입을 되살려줄지도 모르지 그 사람이라면 그 물건이나 개념에 이름을 붙여줄지도 모르지 혹은 그 사람이라면 빛으로부터 어둠을 분리해낼지도 모르지 나는 스물네명의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 있었지 나는 살아남았어
-----------------------------------------------------------------------------
폭탄의 지름
예후다 아미차이(1924~2000)/ 히브루의 대표적인 시인
폭탄의 지름은 30cm 그리고 효력이 미치는 지역의 지름은 약 7m 그 안에서는 4명이 죽고 11명이 부상당하는 범위지. 그리고 그들 주위의 고통과 시간의 원은 두개의 병원과 하나의 공동묘지로 아주 크게 퍼져나가지. 그러나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묻힌 젊은 여인은 그 원을 더욱 크게 그려나가지.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외로운 사나이가 사는 저 먼 그곳도 원 안에서는 세상의 한 부분이 되는 거지. 나는 이제 부모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 신의 자리에까지 닿는다는 그 울음소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네. 그리로부터 앞으로 그려지는 그 끝없는 원 안에는 신조차 없네.
|
영문학 사상 최고의 반전시인 윌프레드 오언의 삶과 제1차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