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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특집 | 등록 2003.07.24(목) 제4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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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여, 평화를 관통하라 한국전쟁 정전 50돌, 세계의 시를 통해 본 전쟁과 평화의 메시지
7월27일로 한국전쟁 정전 50주년을 맞이한다. 종전은 축하할 사실이지만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전쟁은 여전히 존재하는 불안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종전을 기념하는 이유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기 위해서다. 그 다짐에 가장 합당한 일은 평화를 노래하는 게 아니겠는가. 평화의 시는 역설적이게도 전쟁에 대한 시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평화를 깨뜨리면서 일어나고 평화는 전쟁을 극복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과 그 비극을 이야기해주는 전쟁시야말로 평화의 메시지, 바로 그것이다.
전쟁 찬양, 그리고 전쟁에의 질문
하지만 전쟁시의 의미는 처음부터 ‘자비나 동정’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영국의 계관시인 앤드류 모션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전쟁시인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전 세월에도 시인들은 전쟁에 대한 시를 써왔지만 그들의 시적 소재나 주제는 전쟁에 대한 찬양 일변도였다. 그리스나 로마 시대 당시의 시인들은 전쟁을 국가의 승리, 그리고 전사의 용기와 지도자의 용맹함으로 상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얼마간 ‘무공’에 대한 잠재적 예찬이 본능적으로 깔려 있다고 말하면 틀린 것일까? 예를 들어 영국의 시를 얘기할 때 가장 윗대 조상으로 꼽히는 베어울프도 전쟁은 생존과 명예를 위한 투쟁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노래했다. 셰익스피어도 전쟁을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위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힘을 다지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그렸다. ‘평화로울 땐 겸손하고 조심스런 게 남자다움이지만 전쟁의 포성이 귓전을 때릴 때는 맹호의 동작을 닮아, 전쟁에 단련된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은, 그 태생에 부끄럽지 않은 사나이’(헨리 5세)가 되라며 셰익스피어는 작품 속 전사들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들의 예민한 감수성은 결국 전쟁의 참혹함에 눈감을 수 없었다. 초서나 콜리지, 휘트먼과 같은 대시인들의 시에서 전쟁은 공포와 두려움, 절망, 슬픔의 단어로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주조는 그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국가를 예찬하고 전쟁의 목적을 고귀한 것으로 숭상하는 태도는 여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전쟁시의 의미는 달라졌다. 영웅이 사라지고 승리의 벅찬 감흥도 없어졌다. 나약한 한 여인이 언덕에 앉아 전사한 연인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는 가버렸어요. 이제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계획도 정말이지 소용없게 된 거지요’(이보르 거니의 ‘사랑하는 그대에게’ 중에서). 이런 변화는 물론 저절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전쟁을 노래할 때 관행처럼 되어 있던 영광이니 영웅, 그 모든 전통을 과감히 깨부순 당대의 시인들은 윌프레드 오웬(상자기사 참조), 이보르 거니, 지그프리드 사순, 그리고 아이삭 로젠버그와 같은 이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목격한 이들에게 영웅적인 전쟁시는 위선과 거짓의 노래였을 뿐이었다. 누구를 위해 젊은이들은 죽어갔나? 전쟁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었던가? 전쟁시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이러한 ‘전쟁에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시인의 눈길은 과거 전장의 마르지 않은 무덤에 묻혀 결코 눈에 띄지 않았던 어린 병사에게까지 맞춰졌다. ‘내가 알던 어린 병사는 순진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지. 외로운 어둠 속에서도 잠을 잘 자고 아침이면 종달새 소리에 맞춰 깨어나던 그 어린병사’는 전투에서 죽지 못했다. 전장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참호 속에서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고 자신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을 시작한 위정자들은 뒤쪽에서 팔짱을 낀 채 목청껏 외쳐댔다. ‘조국을 위하여’라는 미명으로 젊은이들은 전선으로 내몰렸다. 시인은 절규한다. ‘군대 행진에 환호하는 젊은 그대여, 그 지옥을 알지 못하게 집안으로 들어가 기도나 드리게’(지그프리드 사순의 ‘참호 속의 자살’ 중에서).
내 동생에게 죽임 당한 첫사랑이여
‘증오는 도처에 깔려 있다’(켈리 그리피스). 그래서 분쟁과 갈등은 연일 터지고 그 사이에서 무고한 죽음은 행렬을 이었다.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했던가. 전쟁시는 지역을 넘어서 세계 도처 전쟁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가슴 저미게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캄보디아, 걸프전, 아일랜드 사태, 아프카니스탄…. 분쟁의 대상도 분쟁의 원인도 다르지만 전쟁의 참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전쟁시는 보여준다. 민족분쟁이 이어지는 아일랜드에서는 ‘내 동생에게 죽임 당한 내 첫사랑의 무덤’이 있다. 아랍지역 어디선가 학살을 목격한 자는 ‘이슬방울이 무기가 되는 것도 보았다’며 전쟁의 공포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인간을 괴롭히고 능멸하고 있음을 전쟁시에서 놓치지 않고 고발한다. 베트남 전쟁터의 한 군인은 지뢰가 말할 수 없이 두렵고 무서웠다. 언제고 불쑥 자신의 허리 높이로 솟아올라 몸을 두 동강 낼 것 같아 그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저기 방금 잘린 다리가 보인다. 누군가 소리친다. 내 눈을 가져가, 내 심장도 가져가…’ 지뢰를 밟아 사지가 잘린 전우가 자신의 장기를 이식해가라고 절규한다. 베트남에서는 너무 흔해서 별 충격도 주지 않는 광경이 아니었던가. 사라예보의 거리에는 보스니아 사람, 혹은 그 반대쪽의 사람인지 인종청소의 희생자로 총살당해 그의 피가 흥건히 거리를 적시고 있다. 바람에 날려온 신문지가 그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겨드랑이에 빵을 낀 채 지나쳐 갔다. 강에는 한 여인의 주검이 둥둥 떠가고 있었다. 다리 위를 지나가면서 나는 그 여인의 팔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고란 시믹의 ‘사라예보의 슬픔’ 중에서). 먹을 빵을 꿰차고 죽은 이의 팔목시계를 힐끗거리는 살아남은 자의 모습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것이다.
종은 그대를 위해서 울리니…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던 날, 누구는 쇼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코소보에서 총격전으로 시민들이 죽어갈 때 다른 땅에 사는 누군가는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먼지만 날리는 사막에서 아프가니스탄의 한 여인이 부르카 안에서 끊어지듯 절규하던 그 날, 또 다른 쪽에 사는 누군가는 햇빛 아래에서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과연 그들만의 고통일까? 시인은 묻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나서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었지. 그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시인은 대답한다.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마틴 니에몰러 목사의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 중에서). 전쟁을 이야기해주는 시는 평화를 일구어내야 하는 책임은 결국 우리의 연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의 감정을 가장 강하고 진실되게 반영해주는 시는 시간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수십년 전 혹은 수백년 전 전쟁 속의 고통을 그려놓은 시는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간격 없이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9·11 사태가 터졌을 때 그들은 무슨 말을 했을지,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시를 읽어보자. ‘기독교도 아니야, 유대인도 아니고, 무슬림도 아니고, 힌두, 불교, 수피 혹은 선 그 어느 종교도, 문화적 화법도 아니야, 나는 사랑하는 이들 모두에게 속해 있지’. 시, 그 안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힘이 있다. 인간의 고통을 꿰뚫어볼 줄 아는 시인의 혜안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영원토록 살아 숨쉬는 것 같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시를, 평화시를 읽는 연유다. 시는 또한 우리 모두를 하나로 이어주는 강한 연대로 작용한다. ‘이 시를 당신의 손 위에 올려놓고 읽어보시라. 당신이 이 시를 읽으며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면’(앤드류 다톤의 ‘종이비행기’ 중에서), 그 하늘 다른 쪽의 난민 캠프에 사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시인은 강조한다. 시는 인류애에 호소하는 가장 보편적인 말인 것이다. 아니, 말이 아니라 숨쉬기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영웅이 되기를 원하는 군인은 사실 아무도 없다’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구처럼 누구도 전쟁을 용인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의 잔인함에 동의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전장이 내 땅이 아니니 다행이라 여기는 이도 없을 것이다. 다른 이의 평화는 바로 나의 평화가 아닌가. 우리는 그 사실을 다음의 연대에서 읽어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러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서 울리니’(존 던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에서).
권은정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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