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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는 반복된다 걸프전이 9·11을 낳은 것처럼 이라크에서 승전보를 울린 미국의 야심은 다시 피를 부를 것
칼리프 알 라시드의 도시. 압바시드 제국의 영광이 살아 숨쉬는 땅. 인류에게 과학과 문학, 예술과 철학을 안겨다준 문명의 요람. 미 해병대가 바그다드 시내를 배회하는 모습은 아랍인의 심장을 쥐어뜯는다. 아랍에미리트의 일간지 <걸프뉴스>는 4월10일치 기사에서 “몽골과 타타르의 말 발굽이 사원을 유린하고, 신전과 도서관을 더럽히고, 어린이의 피를 거리에 뿌렸을 때 우리의 조상들은 통한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웃어야 할 것인가 울어야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테러리스트 2세대가 꿈틀거린다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철거된 뒤 미국 내에서는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여론이 급상승했다.
반면 아랍권에선 부시 대통령과는 다른 측면에서 알카에다와 이라크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알카에다는 1991년 제1차 걸프전의 산물이다. 오사마 빈 라덴은 전쟁 초기부터 “아랍 땅에 외국군이 주둔함으로써 아랍의 자주성을 훼손하고 이슬람 성지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을, 중세시대 예루살렘을 장악하기 위해 몰려온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보는 인식도 확산됐다. 여기에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쪽으로 기운 미국의 중동정책도 아랍 민심을 들끓게 했다. 이것이 알카에다와 이라크를 연결시켜주는 매개고리인 셈이다.
1차 걸프전은 쿠웨이트를 침략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시작됐다. 유엔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국가를 포함한 광범위한 다국적군이 구성됐다. 그럼에도 빈 라덴은 역사적 상징을 교묘히 이용해, 다국적군을 ‘이슬람에 맞선 십자군’으로 덧칠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이라크 침공은 116개 비동맹회원국과 아랍연맹은 물론 프랑스·독일 등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벌어졌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쟁을 허락하지 않았고, 코피 아난 유엔총장은 “유엔 헌장과 국제법 위반”임을 분명히 했다.
개전 4주 만에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 주요 도시 대부분을 장악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애초 침공 이유를 무색케 하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알카에다보다 단호하게 미군을 중동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테러리스트 2세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승리감에 도취한 워싱턴에서는 ‘다음 상대’를 찾고 있다. 폭력의 역사는 이렇게 되풀이된다.
“이라크 침공은 4차 세계대전의 시작”
이에 따라 이른바 ‘좋은 편’과 ‘나쁜 편’을 가르는 일이 중요해졌다. 같은 대량살상무기도 미국의 우방이나 동맹국이 보유하는 것은 허용됐고, 심지어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는 국가가 이들 무기를 보유하면, 무장해제는 물론 정권교체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인식 아래 국제 법규와 조약은 미국의 행동을 제약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라크 침공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이제 미국의 앞길은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제임스 울시 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최근 “이라크 침공은 (냉전을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보면) 제4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미국의 적은 이란의 종교 지도자들과 시리아 같은 무법국가들은 물론 이슬람 테러조직을 모두 포괄한다”고 말했다.
이라크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둔 부시 행정부는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원하는 국제정세를 만들어낼 태세다. 전후 이라크에 교두보를 마련한 뒤, 사우디아라비아·이란·시리아·이집트·리비아 등 여타 중동국가로 ‘민주주의’를 수출하겠다는 게 부시 행정부의 계산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민주화의 도미노’ 이론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먼저 대규모 미군 병력이 이라크에 장기 주둔하는 것 자체가 휘발성이 높다. 미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걸프지역에 군함 30척과 전투기·폭격기 175대를 포함해 1만7천~2만5천명의 병력을 유지해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프린스 술탄 공군기지, 쿠웨이트의 알리 알살렘 공군기지와 알자베르 공군기지, 아랍에미리트의 알다하프라 공군기지 등에 주둔했다. 이라크 침공이 끝난 뒤에도 미국은 △쿠웨이트 아리프잔 기지에 육군본부 △사우디아라비아 프린스 술탄 기지에 공군본부 △바레인에 해군본부를 각각 두고, 카타르의 알우데이드 기지에 중부군 사령부를 두는 현 체제를 유지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근본주의 집권 불러올 수도
그동안 이라크 사회를 장악해 왔던 수니파는 무슬림의 소수파이며, 다수파인 시아파 무슬림은 사회적으로 소외돼 왔다. 또한 쿠르드족이 종족분쟁을 일으키면 이는 이란·터키·시리아 등지 쿠르드족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미 의회조사국(CRS) 케네스 캐츠먼 연구원은 지난 2월 초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1991년 당시 아버지 부시 행정부가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지 않은 것도 포스트 사담 시대가 가져올지 모를 혼란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약탈과 방화가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부시 행정부가 후세인의 뒤를 이어 군부나 바트당 인물이 정권을 물려받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더욱 개방된 정치체제가 오히려 중동지역 국가에서 가장 활동적인 야당세력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집권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강요된 민주주의가 미국의 이익에 적대적 세력에 의한 정권교체로 귀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을 대표로 하는 부시 행정부 내 매파들은 “사담 후세인 정권 전복을 위한 미국의 전쟁이 중동지역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 혁명을 이뤄낼 것”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다가올 국제정세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전조인가 승리감에 도취한 이들이 세계지도를 새로 그리는 사이, 바스라와 바그다드에서 이라크 민중들은 미·영의 군사적 승리를 약탈과 방화로 축하했다.
또 다른 ‘약탈전’도 이미 시작됐다. 전후 복구와 민영화라는 이름의 이전투구가 이라크 전역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미국의 진보적 주간지 <네이션>은 최신호에서 “이라크 전후 재건의 신호탄이 될 480만달러 상당의 움카스르 항구의 운영권 계약이 미국의 스티브도러링사에 낙찰됐다”고 전했다. 또 캘리포니아주 출신 공화당 다렐 아이사 하원의원은 미 국방부가 전후 이라크에 미 퀄컴사에 특허권이 있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휴대폰 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제출했다.
“이번 전쟁이 원유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이번 전쟁은 원유와 수도, 도로와 열차, 휴대폰과 항구·공항 시설 등이 모두 관련돼 있다. 자비(이라크 해방)를 가장한 ‘집단 절도’(원유 확보)와 대표성 없는 (국영석유회사의) 민영화 물결이 곳곳에서 넘실대고 있다. 이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해방된 이라크’는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다국적 자본을 위한 잔치판이 될 것이다. …미국은 어쩌면 새로운 자유무역지대로 가는 길을 폭격을 퍼부으며 열어젖혔는지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이라크를 겨냥한 군사작전은 거의 끝났지만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바그다드를 버린 사담 후세인에 대한 충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미·영 두 나라를 해방자가 아닌 침략자로 보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발행되는 주간 <알아흐람>은 최신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힘의 균형축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테러는 힘의 균형추 구실을 한다. 자국의 정체성과 가치체계가 미국의 헤게모니 때문에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국제법과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유엔을 강화시킬 만한 자원이 전무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테러공격은 약자를 위한 마지막 방패일 수 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과 맞선 전쟁에서는 이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많은 문제들을 담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도 동시에 열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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