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3년02월13일 제446호 

“조지 부시 무기징역!”

오는 3월부터 본격 활동 시작한 국제형사재판소(ICC) … 미국의 방해속에 한국의 선택은?

부시: (가만있자. 여기가 어디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이하 ICC) 내가 죄인이라도 됐단 말이야 아니 미국의 대통령인 나를 누가 감히….)
재판장: 지금부터 이라크 무력침공 사건에 대해 최종선고를 하겠습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무기징역!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 징역 30년!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징역 15년!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 징역 15년!
부시: (야! 누가 이따위 엉터리 법정을 만들었어 말도 안 돼.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아니, 그리고 내가 벌써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고)

‘미국에게 불편한 존재’로 부상하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부시가 큰 소리로 청중을 향해 외쳤지만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1심 때 30년형을 선고받은 블레어는 부시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 감형을 받게 됐다며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고 있다.

부시: (저런 푸들 같은 놈. 저 놈은 원래 맘에 들지 않았어.)

부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동안 갑자기 장면이 바뀌더니 뉴스가 방송된다. 누구의 방인지 모르겠는데 2009년 달력이 걸려 있다.

기자 :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무기사찰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3년 3월, 유엔의 합의를 거치지 않고 이라크를 무력침공한 미국과 영국의 전쟁 책임자에 대한 항소심이 오늘 네덜란드 헤이그 ICC에서 열렸습니다. (중략) 항소심 재판부는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는 부시에게 무기징역형을, ICC의 해체를 선동한 혐의가 추가된 럼즈펠드에게는 징역 30년형을, 종범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블레어와 개전의 정이 뚜렷한 파월에게는 각각 징역 15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들은 이라크가 무기를 숨긴 사실이 명백하고, 이는 국제평화에 심각한 위험요소였으므로 이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후유~ 꿈이었잖아.’

부시 대통령은 화들짝 놀라 잠이 깼다. 전날 먹은 과자가 거꾸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과자를 먹다 죽을 뻔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요즘도 주치의 몰래 과자를 먹고 있다).

‘안 되지. 이래선 안 되지. 오늘이라도 빨리 얼간이 클린턴이 한 서명을 철회해야지. 위대한 미국의 대통령이 감방에 갈 수는 없잖아’ 그는 자신의 결단력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5월, ICC 로마규정에 대해 클린턴이 한 미국의 서명을 무효화했다. 부시가 재판받는 꿈을 꾸지는 않았겠지만, ICC가 미국에게 매우 불편한 존재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오는 3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ICC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인종청소나 난민학살과 같은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개인들을 사법 처리할 국제기구다. 로마규정이란 1998년 여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유엔 전권외교회의가 채택한 상설적인 ICC 설립을 위한 규정을 말한다.

미국은 왜 ‘불처벌협정’을 강요하는가


사진/ 미국의 불처벌협정 강요는 세계 각국 시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박승화 기자)


미국은 서명 철회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미국민을 ICC에 인도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의 양자협정(이른바 불처벌협정) 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ICC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행위로서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세계 비정부기구(NGO)들은 이 협정을 ‘헤이그 침공법’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AI)는 “미국은 상대국가에게 불처벌협정 체결을 거부할 경우 군대를 철수하거나 원조를 끊겠다고 협박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현재 미국과 불처벌협정을 체결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동티모르·엘살바도르·온두라스·이스라엘·시에라리온 등 19개국이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국제사면위원회의 폭로가 어느 정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캐나다·독일·스웨덴 등은 협정 체결을 거부했다. 유럽의 정부 간 협력기구인 유럽회의는 2002년 9월, 미국의 불처벌협정 체결 강요에 반대하는 공식입장을 채택하고, 회원국들에게 협정 체결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으며, 영국과 이스라엘 같은 친미국가들만 미국을 옹호하고 있다.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불처벌협정이란 당사국 간 동의 없이는 어떤 범인도 ICC에 양도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런 불처벌협정을 강요하는 것일까 1998년 10월 열린 유엔총회에서 미국의 수석대표인 데이비드 셰퍼가 한 연설에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고려해보자. ICC 규정의 당사국이 아닌 국가가 그 영역 안에 있는 소수민족에 대해 테러전을 개시했다. 수천명의 무고한 시민이 살해당했다. 국제평화와 안전이 위태롭게 됐다. 미국이 이러한 살해행위에 개입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동맹군에 참여했다. 불행하게도 그 과정에서 군사적 목표에 가하려는 폭탄이 빗나가 병원에 맞고, 아파트 건물을 붕괴시켰다. 몇몇 시민들은 인간방패로 이용돼 미국 군인에 의해 피격됐다. 잔학행위에 책임이 있는 국가가 미국의 장교와 사령관이 ICC에 기소돼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런 요구에 대해 일부 국가들이 지지한다. 로마규정에 따르면, ICC는 수천명을 살해한 책임이 있는 자들은 수사할 수 없는 반면, 미국의 장교·사령관·군인들은 국제수사뿐 아니라 기소에까지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드 셰퍼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ICC 비준국이 아니더라도, 다시 말해 당사국이 아니더라도 범죄혐의가 인정될 경우 기소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수천명을 살해한 자들을 수사할 수 없다는 주장은 기만적 선동인 셈이다.

“키신저를 봐, 얼마나 귀찮은가”


사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전경(좌). 미국은 처음부터 ICC설립을 위한 회의를 못마땅해했다(우). (AP연합)


세계 20~30개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는 미국은, 해외파병 미군이 정치적 동기에 의해 기소되거나 재판받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ICC 설립에 반대해왔다. 특히 미 국방부는 군사작전으로 인해 해외에서 재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미군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미국이 정말 보호하고 싶어하는 것은 군인이 아닌 고위급 관료들이다. 이런 사실은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데서 일부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 한 관리는 “부시 대통령과 럼즈펠드 국방장관, 파월 국무장관 같은 인물이 관심의 핵심이고 키신저 전 장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이는 1973년 칠레 쿠데타와 이후 17년간의 피노체트 독재를 지원한 혐의 등으로 국제법정 회부 압력을 받고 있는 헨리 키신저 전 국방장관과 같은 사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이 국제기구 위에 군림해온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은 이제 국제기구의 외피를 거추장스러워하고 있다. 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그런 것처럼, 미국이 벌인 전쟁 가운데 유엔의 승인을 받은 전쟁은 거의 없다. 평화적 수단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유엔 안보리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무력사용을 할 수 없도록 돼 있는 유엔헌장과 ICC의 판례 등 국제질서는 사실상 무시돼 왔다.

특히 부시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은 한마디로 초법적 세계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부시 대통령이 밝힌 ‘국가안보전략’(일명 부시 독트린)은 선제공격의 범주를 크게 넓혔다. 미국 내 전문가들은 장래에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독자적 판단만으로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이른바 ‘예방전쟁’까지 허용한 것으로 명백히 국제법의 테두리를 넘어선다고 지적한다. 또 지난달 부시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효율적으로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특수부대가 파괴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비밀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이 격렬한 논란 속에 추진하고 미사일방어체제(MD)는 이런 선제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방어기구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미국은 지난해 7월 우리나라에도 양자협정 체결을 요구한 상태지만, 우리 정부의 태도는 오리무중이다. 외교통상부 남관표 심의관은 “이라크 사태 등 여러 현안들이 생기는 바람에 아직 협상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입장을 얘기하기는 어렵다. 우방국들의 입장 등을 고려하되 ICC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노무현은 미국에 ‘노’할 것인가

우리나라 정부대표로 ICC 설립에 참여한 김영석 교수(아주대·법학)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미국과의 불처벌협정 체결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미국과 이미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별도로 불처벌협정을 맺을 필요가 없다. 만약 미국과 불처벌협정을 맺으면 이는 ICC의 근본적인 목적을 훼손하는 것이므로, 당사국으로서 로마규정을 준수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평소 지론에 비춰볼 때 낙관적 전망을 할 수 있겠지만, 상황이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최근 북한 핵위기와 관련해 노 당선자의 입지가 좁아진데다, 미국 우파들의 주한미군 철수 협박에 노 당선자쪽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한-미 연합전력 차원의 MD기구 창설과 이지스함 도입을 통해 미국의 이른바 MD계획에 사실상 참여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제인권단체인 인권감시협회(HRW)가 “ICC 창설 논의과정에서 큰 구실을 한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로서, 또 식민통치와 전쟁을 겪은 나라로서 미국과의 양자협정에 대한 한국의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에 대해 ‘노’라고 말할 수 있을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이재성 기자 firi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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