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루주 혁명 30돌 기념 특별 인터뷰… 살아있는 최고책임자인 누온 체아 전 캄푸치아공산당 부서기장의 장장 5시간 심경고백
▣ 파일린=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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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메르루주 2인자였던 누온 체아 전 캄푸치아공산당 부서기장. 그는 인터뷰 내내 요리조리 말을 돌리지 않고 화끈하게 대답했다. (사진/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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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했다. ‘Brother Number Two’를 만난다는 건, 나를 거꾸로 뒤집어 깊고 깊은 우물과 같은 역사 속에 집어넣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일린에서 타이쪽으로 40여분 달려 국경선을 코앞에 둔 외딴 곳에 자리잡은 허름한 그이의 집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입술이 말랐다. 심장박동처럼 두근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2층 마루에 올라서자 사방에서 신기루 같은 햇빛이 확 몰려들었다. 그 틈 사이로, 한 가락 하는 사내 기운을 풍기는 백발 늙은이가 색안경을 끼고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렇다. 사람들이 ‘살인마’라고도 하고 ‘학살자’라고도 하는 그이를 아무 탈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었다.
누온 체아(Nuon Chea·전 캄푸치아공산당 부서기장 겸 국회의장). 혁명을 꿈꾸며 한 시대를 풍미한, 그러고는 실패한 역사를 모조리 뒤집어쓴 채 그저 부채질로 하루를 때우지만, 그는 여전히 강렬한 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말문이 열리자 내 마음은 이내 녹녹해졌다. 그이가 역사를 감추려고 애쓰거나 핑곗거리를 찾아 요리조리 말을 돌리지 않고 ‘마초’다운 화끈한 대답들을 바로바로 해주었기 때문이다.
타이공산당이 밋밋해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왜들, 다 그렇게 눈이 문제죠?
눈이 아려 빛을 쳐다보지 못해. 방안에서도 색안경을 껴. 수술해야 한대.
방콕 병원들이 좋겠는데?
거긴 갈 수 없어. 내가 도망쳐버릴까봐 타이 정부에서 하루짜리 비자밖엔 안 내주니….
타이쪽에 힘깨나 쓰는 이들과 친분이 있다던데?
두 정부(캄보디아와 타이) 사이의 일이라….
기왕 받아준 인터뷰니 오늘은 속시원히 털어내봅시다.
충분히 답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세.
바탐방(Battambang) 시절부터 시작합시다. 어릴 때 가족의 영향을 받았을 텐데?
농사짓고 장사도 좀 했지만 우린 가난했어. 온 식구가 서로 다른 종교를 믿어서 집안 분위기는 자유로웠지만….
누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나?
없어. 다만 어머니를 보며 사람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지.
아무래도 그 무렵 프랑스에 이어 타이의 통치를 받던 바탐방의 환경도 작용했을 텐데?
프랑스 사람들이 캄보디아 사람을 함부로 다루는 걸 보며 ‘독립’을 생각하게 됐지.
근데 타이로 유학하게 된 사연은?
프랑스도 싫고, 프놈펜도 싫었어. 식민통치를 받았으니 그게 그거였지. 그러다 캄보디아보다는 더 자유롭고 환경이 좋은 방콕을 택하게 됐던 거야.
당신이 유학한 탐마삿(Thammasat) 대학 사회과학부는 타이에서 비교적 진보적 기운을 지닌 곳이고, 그러다 보니 늘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섰는데, 어땠는지?
우선 먹고살려고 발버둥쳤지. 잠은 절에서 자고, 우체국·재무부·외무부에서 잡무를 보며 학교에 다녔어. 그런 과정에서 타이공산당(CPT)에 참여했어.
왜 캄보디아로 되돌아갔나? 탐마삿 출신이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을 텐데.
타이공산당 투쟁이 밋밋했고 캄보디아에 도움이 안 됐어. 그래서 베트남이 이끌던 인도차이나공산당(ICP)으로 적을 옮긴 거지. 베트남은 반식민투쟁에 열성적이었으니.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옮긴 건 캄보디아위원회 부서기장이었던 사촌형 시우 헹(Sieu Heng)의 영향이었나?
아니. 내 스스로 판단한 거야.

△ 크메르루주 혁명 기간 동지들과의 모습. 1인자였던 폴 포트와의 한때.(사진/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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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주민들을 농촌으로 대량 소개한 이유
공산당사에 시우 헹이 논란거린데, 론 놀(Lon Nol) 정부에 참여한 건 배반이겠지?
배반이라 할 수 없어. 그 일로 아무도 체포되거나 한 적도 없었고.
근데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크메르루주) 정부가 왜 그이를 살해했나? 당신이 명령을 내렸다는데?
(웃음) 내가 그럴 수가 있나? 그땐 시우 헹이 어떻게 됐는지도 몰랐어.
당신이 캄보디아공산당(CPK)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도, 결국 시우 헹 문제 때문에 폴 포트(Pol Pot)에게 최고 지도권을 넘겨준 게 아닌가 싶은데?
(뜸들이다가) 그런 게 아냐. 폴 포트는 그만한 능력을 지닌 이였고, 또 당시 상황이 그렇게 흘렀어. 설명하기 복잡해. 누가 됐건 중요한 건 인민들의 지원이었어.
그 이후 폴 포트가 절대권력을 쥐었나? 아니면 내부 권력투쟁 같은 게 있었나?
절대권력은 없었어. 그러니 권력투쟁도 없었고. 민주적인 토론 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음모? 소문? 아무튼 당신이 시우 헹에게 3만달러를 받은 건 어떻게 된 일인가?
(폭소) 그런 구석진 건 또 어떻게 찾아냈나? 받긴 뭘 받아. 한푼도 만진 적 없어.
폴 포트가 당신을 견제하려고 흘린 소문이란 설도 있던데? 폴 포트는 뭐라던가?
폴 포트는 그런 사람이 아냐. 그런 걸로 무슨 말도 없었고.
키우 삼판(Khieu Samphan)이 궁금한데, 그이는 왜 국가 수반이면서 정치상임국 위원이 아니었나? 그래서 그이는 자신이 아무 실권도 없는 ‘허깨비 대통령’이었다고 하던데?
그이는 늦게 참여했어. 정치상임국은 똑똑하거나 잘생겼다고 아무나 하는 게 아냐. 투쟁 경력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어. 또 그이가 왜 허깨비인가? 나름대로 힘이 있었어. 스스로 권력이 있었다 없었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냐. 그런 건 인민들이 판단하는 거지.
지난해 키우 삼판이 출판한 자서전 비슷한 책이 있는데, 봤겠지? 어땠나?
음, 봤어.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용감하게 말해야지, 그렇게 변명만 할 바에야….
투쟁기로 넘어가서, 캄보디아공산당의 재원과 무기는 어디서 조달했나?
어디긴, 베트남공산당으로부터지.
왜 베트남공산당은 캄보디아공산당을 지원했나? ?
그이들은 미국이 캄보디아에 기지를 세우는 게 두려워 우릴 지원했고, 그러면서 우릴 먹겠다는 야심도 있었어. 우린 그걸 알면서도 이용한 거지. 무기와 자금이 필요했으니.
1975년 혁명에 성공한 민주캄푸치아 시절로 가보자. 가장 궁금한 건 왜 당신들이 프놈펜을 장악하자마자 소개령을 내려 주민들을 농촌으로 몰았는가인데?
배경 설명이 필요해. 1969~73년에 미국이 베트콩을 잡겠다며 아무 잘못도 없는 캄보디아에 융단폭격을 가해 50만~80만명에 이르는 양민을 학살했잖아. 게다가 미국이 조종해온 론 놀 괴뢰정부를 우리가 뒤엎고 프놈펜에 입성했으니 미군 폭격을 염려했을 수밖에. 냉전이 온 세상을 지배한데다,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상황까지 염두에 둔다면, 그런 결정은 상식으로 봐야 해. 미군 폭격이 예상되는데도 인민들을 도시에 앉혀놓고 죽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겠어?

△ 1975년 프놈펜 입성 뒤 함께 자리한 크메르루즈 지도부. 왼쪽부터 폴 포트, 누온 차에, 엥 사리, 손 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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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그런 순수한 주민 소개령이 강제노동으로 변했나?
당시 상황을 봐. 모든 부를 미국에 기생했던 론 놀 정권 하수인들이 빼먹고 인민들은 먹을거리도 약품도 없었던 시절이야. 캄보디아는 농업사회야. 인민들이 먹으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도시민들도 농사를 짓게 했던 거야.
그 모든 결정을 누가 내렸나?
누구 한 사람이 내린 게 아냐. 혁명 자체가 내린 명령이야. 사람들은 자꾸 ‘누가 명령했나’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혁명은 그렇게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냐.
그건, 사람이 죽었고, 그 책임 소재를 가리자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게 아냐.
좋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나?
앞서 말했듯이 몇 가지 조건이 어우러진 결과다. 부족한 식량과 바닥난 의약품에다 혁명을 이용해 개인적으로 사람을 죽인 나쁜 놈들이 뒤섞여 그런 일이 벌어졌어.
프놈펜 입성 전에 예상했던 일인가?
전혀. 아무도 인민을 처형하겠다는 계획이나 전략을 생각한 적이 절대로 없었어.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혁명전선 내부에 여러 파벌이 섞여 있어 중앙 지도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최고 지도부의 명령이 하부로 내려가면서 파벌들에 의해 변질됐으리라고 본다. 전국적으로 하부 단위 군인들이 벌이는 일을 중앙 지도부가 모두 관리할 수도 없었고.
책임을 하부 단위로 떠넘기는 꼴이 되고 마는데? 기록을 추적해보면 당신이 살해 명령을 내렸을 개연성이 높다. 프놈펜의 투올 슬렝(Tuol Sleng) 형무소 고문·살해건은 더 그렇고.
난 인민을 이용하지 않아. 거듭 말하지만 난 내 직책과 과업에 대해 신성하게 책임진다. 내가 져야 할 몫이 있다면 발뺌하지 않겠다. 그게 삶을 혁명에 바친 내 명예고, 또 내가 살아온 방식이니. 내 목숨을 바칠 각오도 돼 있고. 내가 산들 얼마나 더 살겠나? 당신이 오늘 내게 진실을 듣고 싶어했고, 나는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일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어. 잘 봐. 내가 최고 지도부에 있었는데도 삼촌과 사촌을 포함한 내 핏줄 40여명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 내가 학살을 미리 알았다면 그냥 내버려뒀겠어? 당신이 판단해봐.

△ 실패한 역사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쓴 채 그저 부채질로 하루를 때우지만, 그는 여전히 강렬한 기를 뿜어냈다. (사진/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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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핏줄 40여명도 학살당했다
아무튼 그 학살건으로 국제재판 법정에 설 준비는 돼 있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난 절대 그이들이 바라는 대로 무릎 꿇지 않을 거야. 난 그 외국인들에게 사과할 만큼 잘못한 게 없어. 외국인들이 짓밟은 내 나라를 내가 사랑해서 내가 지켜냈어. 그래서 그런 국제재판이 있기 훨씬 전에 난 내 감정과 정신을 스스로 이미 재판했어.
그 자아 재판의 결과가 뭔가?
그런 건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숨 잃은 인민들을 위해 정치가로서 깊이 반성했고….
인민을 위해? 그걸 뭘로 증명할 수 있나?
내 삶을 통한 정직성으로 충분해. 맘만 먹었다면 나도 얼마든지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살았을 거야. (사방을 둘러보며) 이 초라한 집도 내 것이 아냐. 누가 도와줘서(현재 그이가 살고 있는 집은 전 크메르루주 부총리로서 파일린의 군주 노릇을 해온 이엥 사리(Ieng Sary)의 사위 소유다.) 혁명 전에도, 국회의장 때도, 지금 같은 집에서 살았을 뿐이야.
당신이 한 일들을 후회한 적은 없나? 당신이 명예로 여기는 그 혁명과업과 달리 세상은 학살 부분에 대한 당신의 책임만을 강조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민을 위해 나를 바친 혁명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한 적이 없어. 나란 존재는 그저 거대한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일 뿐이야.
당신의 그 혁명이 30년 되는 해다. 혁명을 한마디로 묘사한다면?
값진 혁명이었다. 모든 적을 몰아낸 뒤 캄보디아 사람이 노예가 아님을 선언했다.
근데 이게 뭔가? 인민들은 여전히 배고프고 정치는 독립성 없이 휘둘리고 있다.
아직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고약한 점이 많은데, 계획과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
말이 너무 어렵다. 그럼 당신이 창조하려던 사회는 어떤 것이었나?
우리 꿈은 부정부패가 없고, 평화롭고, 인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모델이 있지 않았겠나? 당신들의 크메르루주 정책을 살펴보면 ‘변종 마오이즘’ 같은데?
모델 같은 건 없었다. 우린 오직 캄보디아 현실을 바탕으로 삼았을 뿐이다.
‘한번 공산주의자는 영원한 공산주의자’란 말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엉터리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면 변화한다. 세상 만물은 변화하는 주체다. 사회주의라는 근본이념도 취약성을 드러내자 스스로 변해가고 있다.
만약 ‘주권’과 ‘인권’이 충돌한다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 둘은 별개가 아니다.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가치다.
이게 바로 내가 본 민주캄푸치아 역사의 충돌점이다. 민주캄푸치아는 ‘이상’과 ‘현실’이 전혀 맞지 않았다. 주권을 위해 인권을 희생시켰던 게 결과적으로 킬링필드를 낳았다.
혁명전쟁을 평화 시기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어. 우린 독립전쟁을 치렀고, 그 시절은 총 들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게 최고의 가치였어. 언론의 자유니 양심의 자유처럼 ‘무장의 자유’도 인권에서 중요했다는 뜻이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고.

△ '킬링필드의 수괴' 로 불리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지탄을 한몸에 받았던 폴 포트의 최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자살설에서 살해설까지 갖가지 추측을 낳았다.
(사진/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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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훈 센 정부에 투항했나
안롱벵(Anlong Veng) 시절로 넘어가봅시다. 1997년 손 센(Son Sen·민주캄푸치아 부총리 겸 국방장관)을 폴 포트가 죽인 게 맞는지부터?
폴 포트가 누굴 죽였을 리 없어. 자기 비서였던 손 센을 누구보다 믿었던 폴 포트는 소문(손 센이 공금횡령 뒤 훈센 총리쪽으로 투항할 것이라는)을 듣고도 증거가 없다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 폴 포트의 측근들도, 폴 포트가 손 센 살해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고 했고. 또 폴 포트가 손 센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들고 있던 물잔을 떨어뜨릴 만큼 놀란 것만 봐도. 손 센과 그이를 죽인 이들 사이에 개인적 문제가 있었던 듯싶어.
어쨌든 손 센이 죽은 뒤 폴 포트가 당신도 배반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나? 그런 안롱벵 분위기가 결국 1998년 이엥 사리의 도움을 받아 파일린으로 오게 된 계기였나?
이엥 사리와는 관계없어. 다만 안롱벵을 지켜내기 힘든 상황이었고, 투쟁을 지속하고자 키우 삼판과 내가 타이와 관련 있는 위원회에 요청해 파일린으로 오게 된 거지.
그 무렵 훈 센 총리와의 협상설이 나돌았다.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훈 센 총리의 측근에게 들은 바로는 당신과 훈 센 총리가 만나기까지 했다던데?
나중 일이야. 훈 센이 키우 삼판, 이엥 사리,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적은 있지만.
무슨 말이 오갔나? 훈 센이 뭐라던가? 신변보호와 먹고사는 문제를 약속하던가?
그냥 저녁 먹는 자리였을 뿐이야. 우리가 도착하자 훈 센이 “모두 다시 함께 모였군요”라며 그의 아내와 아이들도 우리에게 소개했고. 훈 센이 마음을 말하는 인물인 건 확실해. 그 저녁도 그런 자신의 정직한 마음을 드러낸 자리였지.
혁명 지속을 위해 파일린에 왔다지만, 1998년 12월25일 당신과 키우 삼판은 훈 센 총리 정부에 투항했다. ‘왕국 정체를 인정하고, 훈 센 정부를 존경하며, 시아누크왕을 숭상하고…’ 어쩌고 하는 3개 항 맹세를 담은 투항서를 쓸 때 기분이 어땠나? 누가 그 투항을 추동했나?
1998년 4월15일 폴 포트가 죽은 뒤 타 목(Ta Mok·민주캄푸치아 군최고사령관)이 1999년 3월 체포될 때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는데, 지도자 없는 투쟁이 의미를 상실한 상황이었어. 그래서 더 이상 인민들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야.
폴 포트는 누가 죽였나? 자살로 알려져왔지만, 내가 만난 폴 포트 전 비서는 아니라고 하던데? 또 다른 폴 포트의 한 측근은 그이가 자살하기 전날 당신과 타 목과 키우 삼판이 폴 포트를 훈 센 총리에게 넘기겠다는 말을 전하자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고도 하고…. 그 대가로 당신들은 면죄부를 얻고. 또 미국과 타이 정보국의 살해설도 있고….
(목소리가 높아지며) 거참, 그 시절 타 목과 키우 삼판과 나 사이에는 교통이 아예 없었어. 폴 포트 살해설은 언론이 만든 터무니없는 말이야. 아무도 폴 포트에게 접근할 수 없었는데, 누가 와서 그이를 죽여? 우린 폴 포트가 죽은 날 아침에 타 목이 찾아와서 사망 소식을 전하며 조문하라고 해서 처음 사실을 알았을 뿐이야.
폴 포트 살해설의 미스터리
무엇 때문에 폴 포트가 죽기 전, 한참 동안 그이를 가택연금했나?
타 목이 폴 포트를 가두긴 했지만 가족과 함께 살도록 했어. 그건 폴 포트에게 쏠리는 바깥 세상의 불만과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격리한 거라고. 폴 포트를 위해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폴 포트를 위해서라고?
그렇게 들었어. 타 목이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고, 폴 포트는 힘이 없었으니.
그런 여러 가지 정황들 속에서 앞으로 열릴 국제재판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뭘 대처해? 그냥 열리면 열리는 거지. 겁날 것도, 불행할 것도 없어. 날 잡아 가두면 약값만 더 들 텐데. (웃음) 그 재판에 수천만달러가 들 거라던데, 국제사회가 진정으로 정의를 원한다면 그 돈으로 우리 인민들에게 보탬되는 일이나 하라고 해.
5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났다. 아쉬움이 컸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장거리 인터뷰를 해준 적이 없다지만, 그 5시간은 누온 체아라는 한 인간의 손톱에 낀 때도 건드려보지 못한 허전함만 남겼다. 그이를 통해 캄보디아 현대사를 읽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가당찮은 낭만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이는 솥뚜껑같이 크고 묵직한 손으로 ‘패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온몸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이토록 강한 장력을 지닌 이를 나는 본 적이 없다. 77살 늙은이의 악수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캄보디아 현대사는 이렇게 강력한 손아귀 힘을 지닌 이들에게 볼모로 잡혀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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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크메르루주인가 ‘크메르루주’는 1960년대 캄보디아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전 국왕이 캄푸치아공산당(CPK)을 ‘붉은 크메르’란 뜻의 크메르 크로홈(Khmer Krohom)으로 부른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 뒤, 이 말은 프랑스어인 크메르루주(Khmer Rouge)로 바뀌어 더 유명해지면서 나라 안팎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언론이나 사회과학에서도 공식적으로 사용해왔고, 심지어 캄푸치아공산당원들도 자신을 크메르루주라 즐겨 불러왔다.
그러나 캄푸치아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한 뒤 수립한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1975~1979) 정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면서부터 ‘킬링필드’란 신조어가 생겨났고, 결국 크메르루주는 학살의 대명사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크메르루주는 악명으로 회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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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재판, 또 다른 음모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올 8월 목표로 비용 5600만달러를 책정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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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에 입성한 뒤 반대파를 심문했다는 투올 슬렝 감옥. 이곳에서 2만명 가까운 이들이 죽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현재는 관광지가 됐다. (사진/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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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서부터 느닷없이 ‘국제전범재판’이 유행처럼 번졌다. 국제사회가 그만큼 정신없이 전쟁놀음을 벌였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전범재판이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지배도구로 등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 르완다, 보스니아에 이어 유고와 이라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합법성과 실효성이다. 르완다와 보스니아를 대상으로 한 전범재판은 10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유고의 경우는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을 ‘학살자’로 잡아놓고 있지만 아직까지 아무것도 풀어낸 게 없다. 이라크의 경우 후세인 전 대통령을 어떤 죄목으로 기소할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유고는 미군과 나토연합군이 ‘인도적인 공습’(Humanitarian Bombardment)이란 거짓말로, 이라크는 미군과 그 동맹국이 ‘대량살상무기’(WMD)라는 사기로 각각 전쟁을 벌인 경우라 처음부터 국제전범재판 자체가 코미디로 출발했다.
그런데 크메르루주를 놓고 또 국제재판을 벌이겠다고 8년째 캄보디아 정부와 유엔(미국)이 실랑이를 벌여왔다. 이건 30년 전 일을 놓고 벌이는 또 다른 코미디다. 크메르루주가 200만~300만명에 이르는 시민을 학살했다는, 바로 그 유명한 ‘킬링필드’ 전설이다.
1997년 캄보디아 훈 센 총리 정부가 유엔에 재판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이 국제재판건은 온갖 정치적 흥정으로 세월을 보냈다. 재판 장소, 비용, 구성원, 형벌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정하는 데만도 무려 8년이 걸렸다. 그사이 ‘전범재판’이란 말도 사라지고 ‘국제재판’으로 결정났다. 그 용어 차이는 엄청난 역사적 왜곡을 바탕에 깐 속임수였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각각 다른 두 정부가 10년 동안 연속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1969~73년 미군이 ‘베트콩’을 잡겠다며 캄보디아에 불법 공습을 감행해 최소 30만에서 80만명의 양민을 학살했고, 이어 크메르루주의 민주캄푸치아 집권기인 1975~79년 약 100만명이 숙청, 중노동, 기아,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를 모두 합쳐 최대 180만명이 사망한 게 지금까지 알려진 킬링필드의 정체다. 이 국제재판 준비과정에서 미국은 캄보디아 정부를 정치·경제적으로 압박해 자신들이 저지른 킬링필드 기간인 1969~73년을 제외했다. 따라서 캄보디아 킬링필드 국제재판은 크메르루주 기간인 1975~79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는 역사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킬링필드 국제재판에 드는 비용으로 자그마치 5600만달러를 책정했다. 장삿속이란 뜻이다. 이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유엔은 “거저 먹겠다”는 식으로 부자 나라들에게 기부금을 요청했고, 캄보디아 정부는 예산 100%가 통장에 들어오지 않는 한 재판을 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 걷힌 돈은 일본 기부금 2150만달러에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가 내놓은 500만달러가 다다. 아직 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현재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올 8월 국제재판을 여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회의를 열고 있지만, 정확한 일정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돈만 알고 있을 뿐.
게다가 국제재판에 회부할 대상마저 결정되지 않았다. 크메르루주 최고 실권자였던 폴 포트는 이미 가고 없다. 제2인자였던 누온 체아와 서열 3위였던 이엥 사리 전 부총리, 서열 4위였던 타 목 사령관 그리고 대통령과 총리를 지낸 키우 삼판이 최고책임자로 기소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투올 슬렝 형무소 책임자였던 두 치가 확실한 정도다. 문제는 법을 통해 정의를 세운다는 국제재판이 처음부터 원천적인 차별과 인권유린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최고 책임자로 꼽히는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은 파일린에서 그리고 이엥 사리는 프놈펜 도심의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잘 살고 있다. 반면 타 목과 두 치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군 특별형무소에 갇혀 있다. 재판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6년째 형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유엔과 캄보디아가 추진하는 킬링필드 국제재판은 이렇게 엉터리 같은 절차와 정신머리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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