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전설을 품에 안고 크메르루주의 낙원으로 남은 파일린을 아십니까
▣ 파일린=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1980~90년대 인도차이나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열망’했던 곳이 있다. 바로 난공불락의 크메르루주 요새였던 파일린(Pailin)이다. 1975년 4월17일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루주의 민주캄푸치아 정부에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지낸 이엥 사리가 1979년 베트남군에 쫓겨 파일린에 진지를 마련하고부터 무려 17년에 걸쳐 세 정부가 파상적 공세를 펼치고도 결코 함락시키지 못했던 땅이다. 그래서 파일린 주위는 온통 지뢰밭으로 뒤덮였다. 기자들 사이에도 파일린은 ‘금역’으로 남아 있었다. 적어도 1996년 8월 파일린 군주 이엥 사리가 1만여명에 이르는 크메르루주 군대를 이끌고 훈 센 총리에게 투항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세금 안 내고 군인·경찰도 독립 운영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이제 역사에서 크메르루주는 가고 없다. 그러나 파일린은 여전히 크메르루주의 땅으로 남아 있다. 파일린 군수는 이엥 사리의 경호원이자 크메르루주 415사단장을 지냈던 이 치엔(Y Chhien)이며, 부군수는 이엥 사리의 아들인 이엥 부트(Ieng Vuth)다. 파일린 준자치정부는 중앙정부에 세금을 낼 의무도 없는데다, 오히려 2000년까지는 훈 센 총리에게서 돈을 받기까지 했다. 또 비록 크메르루주 군복에서 정부군 군복으로 바꿔입긴 했지만, 파일린 정부는 여전히 군인 500여명의 군인과 400여명의 경찰, 200여명에 이르는 민병대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 파일린은 한때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큰 사파이어와 루비 광맥을 자랑했다. 루비를 캐는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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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이엥 사리가 투항한 뒤 가장 먼저 파일린을 취재한 기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내 눈에 비친 그 시절 파일린은 메마른 낙원 같았다. 먼지바람이 몰려다니는 도심 한 귀퉁이에는 루비 캐기로 뻘건 내장을 드러낸 대지가 엎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을 표정 없는 얼굴로 쳐다보며 몸을 사렸다. 그 땅을 찾아들었던 이방인도 모두 ‘수상한’ 성분을 지닌 이들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기자들, 일확천금을 꿈꾸는 보석꾼들, 정치를 쫓던 기회주의자들, 얼굴 숨긴 정보요원들…. 그렇게 저마다 위험을 팔아먹고 사는 자들이었다. 한마디로 그 시절 파일린은 돈이 되는 땅이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큰 사파이어와 루비 광맥으로, 거대한 벌목장으로 그리고 24km 떨어진 타이 국경을 통한 밀무역으로 파일린은 그야말로 돈이 넘쳐흘렀다. 바로 그 돈줄이 크메르루주 요새를 지켜낸 뒷심이었고, 또 오늘날 이엥 사리의 프놈펜 대저택이 되었다.

△ 프놈펜에서 370km 북서쪽에 자리잡은 파일린은 여전히 캄보디아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길로 남아 있다.파일린 국경 검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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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9년이 흐른 뒤, 프놈펜에서 370km 북서쪽에 자리잡은 파일린은 여전히 캄보디아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길로 남아 있었다. 한때 최대 격전지였던 바탐방과 파일린을 잇는 10번도로 87km는 지금도 상처투성이로 남아 바깥 세력들이 파일린을 건드리지 못하게 막는 ‘방파제’ 노릇을 하고 있다. 곳곳을 차단했던 많은 크메르루주 초소는 온데간데없고, 집권 캄보디아인민당(CPP) 간판만 빼곡히 들어차 이방인을 맞았다. 파일린 도심에서도 이제 군인이나 경찰을 볼 수 없다. 캄보디아에서 파일린과 같은 안전지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일린은 맥빠진 땅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루비도 사파이어도 모조리 바닥났다며 한숨짓고, 눈에 띄는 산들은 모두 벌거숭이로 변했다. 도심에서는 가라오케와 술집이 유일한 ‘현금작물’로 꼽히고, 국경지대에서는 인민들의 삶과 무관한 카지노만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 파일린 한 사원의 지옥도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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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돈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 많던 파일린의 돈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사람들은 입을 열지 않는다.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게 마오(Maoism)를 좇던 청년혁명은 사라지고 이제 가장 천박한 자본주의가 소리 없이 파일린을 빨아먹고 있다. 그 파일린 한쪽에는 한때 크메르루주를 호령했던 이빨 빠진 호랑이들이 살고 있다. 1998년 12월25일, 훈 센 총리에게 투항한 ‘브라더 넘버 투’ 누온 체아와 대통령과 총리를 지낸 키우 삼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크메르루주의 본부 노릇을 했던 안롱벵에서 기력을 잃고 넘어온 그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파일린은 ‘소도’로 거듭났다.

△ 파일린에 진지를 마련하고 17년을 버티다 훈 센에 투항했던 이엥 사리와 그의 부인 이엥 티리트. 이엥 티리트 역시 크메르루주 최고 지도부 가운데 한명으로 크메르루주에서 사회부 장관을 했던 인물이다.이들은 현재 파일린을 떠나 프놈펜의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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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엥 사리와 누온 체아, 키우 삼판을 법정에 세운다면 그 결과는 또 전쟁뿐이다.” 파일린 정부에서 일하는 티트(32)의 말은 파일린 인민 모두의 것이다. 파일린에서 크메르루주 처단용 국제재판을 인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가 하면 파일린 한 귀퉁이 산속에 크메르루주가 엄청난 무기를 숨겨놓고 있다는 말도 나돈다.
파일린은 그렇게 흘러간 전설을 안고 지금도 크메르루주의 낙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