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발행한 키우 삼판을 체포해 발가벗긴 그의 사진을 대중 앞에 공개하는 치욕적인 창피를 준 뒤 신문을 폐간시켰다.)
아, 그건 격주로 한 1천부쯤 찍었던 불어 신문이지.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왕자의 ‘반식민주의’와 ‘중립노선’을 지원하면서 내 성실성과 헌신성을 증명하고자 했는데, 경찰이란 놈들이…. 정치 입문은 그것과는 상관없고, 사회가 내 청렴성을 필요로 했던 거지. (실제로 그 청렴성만은 대체로 인정받는 편이고, 그래서인지 일흔셋의 나이치고는 얼굴이 참 맑다. 거기에다 대고 ‘혁명’이나 ‘킬링필드’를 캐묻는 일이 어색할 정도로.)

△ 크메르루주는 1975년 프놈펜을 장악하자마자 소개령을 내리고 도시 주민들을 농촌으로 몰았다. 이는 '강제노동' 논란을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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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도 없는 대통령을 봤나?
1962년 처음 의회에 진출한 뒤 곧 통상부 장관이 되었는데, 뭘 했나?
칸달(Kandal)주 사앙(Saang)에서 선출된 다음 노로돔 칸톨(Norodom Kantol) 왕자 정부에서 무역을 맡았지. 내 박사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한, 캄보디아의 불균형 외환거래 관계를 해소하려고 애썼어. 당시 캄보디아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걸로는 경제구조 개선도 경제적 독립도 불가능하다고 믿었거든.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없다. 정부 예산마저 외국 원조에 의존하는 실정인데, 당신의 청년 시절 꿈과 비교해볼 때 ‘역사의 진보’를 얘기할 수 있겠나?
역사의 진보? 그 주제에 크게 실망했어. 파리협정(Paris Accord)이라는 정치적 사안도, 또 균형과 자주정책이라는 사회·경제적 주제도 모두 실현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1975년 혁명에 성공한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시절을 말해보자. 무역·화폐통용 금지 같은 극단적인 ‘공상적 사회주의’로 결판난 민주캄푸치아(흔히 ‘크메르루주’로 부르는)를 놓고 업적과 실정을 구분할 수 있겠나?
역사에서 완전한 것은 없다. 민주캄푸치아는 양면성을 지녔다. 밝은 면은 농업중심 사회인 캄보디아에서 농민을 조직해 국가의 독립성을 지켜냈다는 점이다. 1973~75년의 성공적인 투쟁은 역사가 증명한다. 근데 1975년 정부가 수립되고부터는 어둠이 깔렸다. 사회를 운영할 준비를 제대로 못한 채 집권한 탓이다. 우린 집권하기 전 프놈펜 시민 이주라든지 학살 같은 일들을 상상해본 적도 없다. 또 당시 나는 정책결정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했다고? 비록 당신이 발뺌해왔지만 한 국가를 대표했고 또 캄보디아공산당(CPK)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캄보디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최고결정기구가 아니었다. 중앙위원회 안에 별도로 폴 포트, 이엥 사리, 눈 체아(Noun Chea), 타 목(Ta Mok) 온 웨트(Vorn Vet), 소 핌(So Phim), 님 로스(Nhim Ros), 손 센(Son Sen) 그렇게 8명이 ‘정치상임국’을 설치해 모든 결정을 그곳에서 내렸다.
그러면 현재 살아 있는 정치상임국 위원은 눈 체아, 타 목, 이엥 사리인데, 그이들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인가? 당시 국가 수반(대통령)이었던 당신은 빠지겠다는 뜻인가?
내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진다. 난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미간을 찡그린다).
사실 당신이 주장해온 ‘의전용 대통령’이었단 말도 문제가 있다. 누가 뭐래도 당신은 민주캄푸치아의 이상향을 그린 ‘설계자’였다.
난 외국 정치 지도자들이 프놈펜을 방문하면 양복 입고 나가서 맞이하는 역할만 했다. 행사가 끝나면 사무실로 돌아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업무를 봤다. 비서도 한명 없는 대통령을 봤나? 난 그저 정치상임국이 보내온 문건을 다듬는 게 다였다. 그런 내게 어떤 책임을 묻겠다고? 지금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만한 어떤 증거도 찾아낸 게 없지 않은가?
1988년까지 학살에 대해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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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소 수체앗과 망중한을 즐기는 키우 삼판. 사흘째가 돼서야 기자에게 말문을 텄다. (사진/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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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민주캄푸치아가 얼마나 죽였고,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일이 벌어졌나?
여기 파일린으로 오기 전(1998년)까지만 해도 난 그런 학살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러니 누가 왜 학살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중요했던 시절, 그 중요했던 일들을 최고 지도자가 정말 몰랐다고 해도 되나?
정말이다. 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몰랐다. 참으로 유감이다.
모른다니, 그만하고 요즘 세상으로 돌아와보자.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민주캄푸치아의 학살을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는데, 심정이 어떤가?
난 국제재판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이들 일일 뿐이다.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국제재판은 당신을 핵심 인물로 기소할 분위기인데?
주권을 지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인데,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건가?
그건 당신 생각일 뿐, 현실적으로 당신은 기소를 피할 수 없을 듯하다.
국제사회의 힘을 내가 어떻게 거부하겠냐마는, 뭐가 정의인지는 꼭 따져야 한다.
뭐가 정의인가?
국가 독립 문제가 걸린 상황, 그런 전쟁 상태에서 어떻게 ‘인권’만 강조할 수 있나? 그런 완벽한 역사가 대체 어디 있나? 인권과 주권 가운데 어느 게 중요한가?
학살을 인정한다는 뜻인가?
학살은 이미 역사다. 현실 속에서 그 역사를 판단하는 기준을 말하는 거다.
만약 국제법정에 서게 되면 무슨 말을 할 건가?
날 기소한다면, 지금 내가 당신한테 한 말들을 법정에서 그대로 다시 할 것이다.
중요한 대목이다. 당신의 법정 진술이 공개될 가능성이 희박한데다, 미국이 쥐고 흔드는 언론을 통해 왜곡될 게 뻔하다. 이래도 못 적게 할 건가? (이미 눈치껏 기록해왔지만.)
적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언론을 통해 내가 핵심 인물로 거론되는 게 싫어서다.
그건 착각이다. 이런 보도가 나가든 말든, 이미 당신은 핵심 인물로 찍혀 있다. 피할 생각 말고 옳다면 적극적으로 밝혀야 한다. 기사 하나로 당신을 기소하고 말고 하지도 않는다.
언론을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말하는 게 국제언론이다.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미국에 말려든 이런 ‘반쪽짜리’ 국제재판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현실을 정확히 봐야 한다. 숨겠다는 건, 당신이 경험해온 ‘밀림식 사고’일 뿐이다.
(한참 동안 말이 없다. 불쾌한 듯 얼굴도 붉어졌다.) 그래, 사실은 나 자신을 너무 구석으로 몰았다는 생각이 들긴 해.
말이 난 김에, 미군이 저지른 캄보디아 양민학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그래서 내가 ‘정의’를 물었던 거야. 민주캄푸치아를 법정에 세우겠다면 미군의 민간인학살도 똑같이 법정에 세워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해. 그게 정의지.
프놈펜에서 듣자니, 훈 센 총리가 당신을 포함한 관련자들에게 입을 열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이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런 일은 없었고, 관계도 그저 그렇다. 아마 훈 센 총리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은데?
훈 센 총리의 측근에게 들으니, 지난 총선 때 훈 센 총리를 비롯한 여러 정당들이 당신을 끌어들이려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망설이다) 내가 청렴하다고 소문나서 그랬는가 본데(크게 웃고), 사실은 훈 센 총리의 캄보디아인민당과 야당인 삼라인시당(Sam Rainsy Party)에서 내게 사람을 몇 차례 보내 의사를 물어왔어. 근데 내가 그 제의를 거부했던 거야.
여당과 야당이 모두 손짓
캄보디아 정치판도 참 대단하다. 국제사회가 ‘학살자’로 기소하려는 당신을 끌어들여서라도 선거에서 이기려고 했으니. 아무튼, 이제 남은 건 국제재판 날짜를 잡는 일뿐이고, 거기 걸려들면 감방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데 마지막 꿈이 있을 법도?
우리 캄보디아가 정치·경제적으로 ‘완전한’ 아세안(Asean)의 일원이 되고, 국민들이 킬링필드를 잊고 이제 미래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다 좋은데, 뭘 알고 잊어도 잊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사람들에게 잊자고만 하나?
서로 용서하고 미래를 향해 가야만 캄보디아에 장래가 있다는 뜻이지.
5시간 동안 이어진 긴 인터뷰는 끝났다. 허리도 아프고 골치도 아픈 이 인터뷰를 늙은이는 꼿꼿이 앉아서 치렀다. 캄보디아 현대사, 아무도 ‘모르는’ 그 현대사를 설계하고 이상향을 꿈꾸었던 혁명아 키우 삼판도 ‘모른다고만’ 했다. 역사의 변명은 이렇게 질기게도 이어지고 있다. 두 눈 빤히 뜨고 있는, 기껏 30년 전 역사를 놓고 캄보디아 현대사는 이미 전설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남겨진 고민. “누가 누구를 심판할 것인가?”
과연, 천장을 바라보며 드러누운 채 던진 짱돌은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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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현대사… 키우 삼판은 발뺌해도 좋은가 1931년 : 키우 삼판, 스웨이 리엥주에서 판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남.
1951년 : 베트남이 이끈 인도차이나공산당(ICP) 해산과 3개 공산당(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으로 분리. 캄보디아에는 크메르인민혁명당(KPRP) 창당.
1950년대 : 키우 삼판, 파리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 박사학위 받음.
1954년 : 캄보디아,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5년 : 시아누크왕 퇴위. 선거 통해 재집권.
1959년 : 키우 삼판 귀국. 프놈펜대학 법학과에서 강의. 신문<(L’Observateur>) 발행.
1960년 : 베트남, 크메르노동자당(KWP) 창당 지원. 서기장 토우 사무트(Tou Samouth)를 비롯해 폴 포트, 눈 체아, 이엥 사리, 손 센 등 참여.
1962년 : 토우 사무트 실종(시아누크 비밀경찰의 살해로 추정). 폴 포트, 서기장대행 취임. 키우 삼판, 의회 부의장으로 선출. 통상장관 역임.
1963년 : 시엠 리아프에서 학생과 경찰 충돌. 시아누크, 좌익 소행으로 비난하며 키우 삼판과 의원 5명을 34명의 ‘타도자’ 명단에 포함. 키우 삼판, 장관직 사임.
1966년 : 크메르노동자당, 캄푸치아공산당(CPK)으로 개명.
1967년 : 농민봉기. 론 놀 총리, 유혈 진압 뒤 사임. 시아누크, 공산주의자 배후설 주장과 탄압에 맞서 캄푸치아공산당 무장투쟁 전략 수립. 키우 삼판, 프놈펜 탈출.
1970년 : 론 놀, 미국 정부 지원 아래 쿠데타로 괴뢰정부 수립. 시아누크, 망명 ‘캄푸치아국민연합왕립정부’(RGNUK) 수립. 키우 삼판 부총리 겸 국방장관·총사령관에 임명. 캄푸치아공산당 반 론 놀 무장투쟁.
1975년 : 4월17일, 캄푸치아공산당 프놈펜 입성.
도시민 농촌으로 소개. 중노동·질병·기아로 수많은 시민 사망. 9월, 시아누크 귀국
1976년 :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수립 선언. 시아누크, 국가 수반 사임.
가택연금. 펜 노우스(Pen Nouth) 총리 사임. 폴 포트를 총리로 15인 내각 결성. 인민대표회의에서 국가최고회의간부회 의장(국가수반)으로 키우 삼판 지명.
1978년 : 캄보디아-베트남 국경 충돌 격화. 12월25일, 베트남군 대 캄보디아 전면공격 개시.
1979년 : 1월7일, 베트남군 프놈펜 점령과 괴뢰정부 캄푸치아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수립. 민주캄푸치아 타이 국경으로 피신. 민주캄푸치아의 학살 소문 확산에도 유엔이 민주캄푸치아 정통성 재확인.
키우 삼판, 폴 포트 대신 민주캄푸치아 총리에 취임.
1982년 : 민주캄푸치아, 시아누크의 민족연합전선(FUNCINPEC), 손 산(Son Sann) 전 총리의 크메르인민국가해방전선(KPNLF) 3개 정파 연합체, 망명 민주캄푸치아연립정부(CGDK) 수립. 대통령에 시아누크, 부통령에 키우 삼판, 총리에 손 산 임명.
1986년 : 베트남 캄보디아 일부 지역에서 철군 개시. 괴뢰정권 ‘캄푸치아인민공화국’과 ‘민주캄푸치아연립정부’ 평화협상 시작. 키우 삼판, 협상대표로 참가.
1988년 : 베트남군 전면 철수.
1991년 : 10월23일, 캄보디아 4개 정파 파리평화협정 체결. 키우 삼판 협상대표로 참가.
유엔에 ‘휴전’ ‘난민귀환’ ‘무장해제’ ‘군대해산’ ‘자유총선’에 관한 전권 위임.
11월27일, 키우 삼판 프놈펜 귀국과 동시에 폭동 발생으로 다시 출국.
1992년 : 민주캄푸치아 군대 해산 거부.
1993년 : 유엔, 캄보디아과도행정기구(UNTAC)로 캄보디아 통치 시작.
민주캄푸치아, 파리협정 부정하며 투쟁 돌입.
키우 삼판의 민주캄푸치아 제외한 총선 실시.
1994년 : 캄보디아 의회, 민주캄푸치아 불법화 선언과 특사 조건 투항 권고.
1995년 : 약 7천명에 이르는 키우 삼판 휘하 군인 투항.
1996년 : 민주캄푸치아 최대 병력을 지녔던 전 외무장관 이엥 사리 투항.
정부, 이엥 사리의 영역이었던 파일린에 준자치권 부여.
1998년 : 폴 포트 의문사. 정부군, 타 목 전 민주캄푸치아 최고사령관 체포.
12월25일, 키우 삼판과 민주캄푸치아 제2인자였던 전 국회의장 눈 체아 투항으로 민주캄푸치아 완전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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