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주인은 누구인가. 한국 경제 대동맥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한 채 주주이익 극대화의 논리만을 좇고 있다. IMF 7년, 대형화·겸업화·외국 자본의 진출로 요약되는 정부의 뒤틀린 은행산업 재편의 결과다. <한겨레21>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이 지금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심층 취재했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일러스트레이션 / 정광석)

지난 11월1일, 김정태 전 행장에 이어 국민은행의 새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강정원 행장의 첫 일성은 “은행들의 전쟁”이었다. 그는 “지금 은행권은 어느 은행도 물러설 수 없는 일대 격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결코 물러서지 않고 승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날은 한미은행과 씨티은행 한국지점의 통합으로 탄생한 한국씨티은행이 공식 출범한 날이기도 하다.

전 국민은행장 김정태를 보는 두 시각

외환위기 이후 7년, 11월1일은 국내 은행산업에서 주목할 만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퇴출과 합병을 거듭하면서 대형화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온 은행권이 ‘은행 전쟁’을 공식 선언한데다 외국 자본이 국내 ‘은행영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국내 은행산업을 집어삼킨 외국 자본은 그동안 사모펀드·헤지펀드 등 단순 투기자본 일색이었으나, 이제는 국내에서 장사해 수익을 내겠다는 진짜 투자은행이 등장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권 재편은 △대형화 △외국 자본의 지배 △보험상품(방카슈랑스) 및 적립식 펀드 판매로 확산되고 있는 겸업화 △가계대출 증가와 기업대출 급감 △수익성 위주의 자산 운용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구조조정 태풍이 휘몰아친 7년간 지속된 이런 방식의 재편을 과연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덩치를 키워온 공룡은행들간의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며, 은행권 지각변동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둘러싸고 확연하게 둘로 갈리는 선이 그대로 말해준다. 김 전 행장은 “관치금융에서 은행을 지킨 투사”라고 칭송받는가 하면, “국민경제에서 은행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내팽개친 ‘주주이익 극대화 논리의 기수’”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그는 과연 ‘주주가치 경영’을 선포한 한국 최고의 경영자인가, 아니면 단기 수익성 위주의 은행경영을 주도해 중소기업 대출을 기피하고 은행의 자원배분 기능을 왜곡한 장본인인가.

지난해 말 LG카드 사태가 터졌을 때, 금융시스템 안정화를 위해 출자에 나서달라는 정부의 주문에 대해 그는 “나는 주주 아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면서 ‘신관치금융’을 비판하며 공동 행동을 거부했다. 하이닉스가 유동성 위기에 봉착했을 때, 뉴브리지캐피탈이 인수한 제일은행도 정부의 금융시장 안정 요구에 반기를 들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용기 수석연구원은 “금융시장 붕괴를 초래할 만한 사태가 터질 때마다 외국계 자본이 대주주로 있는 은행들과 국민은행은 주주가치를 내세우며 저항했다”며 “관치금융을 비판하는 건 좋지만, 은행은 본질적으로 혁신적 사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인데 기업의 설비투자와 국민경제는 외면한 채 주주의 사익만을 추구하는 은행들의 모습은 사회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 11월1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연합회 총회에서 은행장들이 '은행경영 강령' 을 통과시키고 있다. (사진 / 한겨레 김종수 기자)

국내 은행은, 외환위기가 은행시스템 위기에서 비롯됐다는 진단에 따라 신속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강요당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2001년 말까지 155조원으로, 이는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의 32.6%(2000년 기준)에 해당한다. 은행은 짝짓기와 덩치 키우기를 되풀이하면서 지난 1997년 말 33개에서 현재 19개로 줄었다. 외환위기 당시 자산규모 기준 세계 200대 은행에 들어간 국내 은행은 외환은행뿐이었으나 지금은 7개 은행이 올라 있고, 부실채권(고정이하여신) 비율도 2000년 말 8.8%에서 올 2분기 2.6%로 대폭 줄었다. 금융지주회사 등 메이저 금융그룹이 탄생하고 자산 건전성도 대폭 향상된 것이다.

기업대출 급감, 가계대출 급증!

전체 금융산업에서 은행의 비중도 날로 커지고 있다.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대우사태와 카드사태가 터지면서 채권·주식이 불안해지자, 안전자산 선호 현상에 따라 돈이 은행으로 대거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개별 시중은행의 평균 자산규모도 1997년 말 30조원이었으나 2003년 말 89조원으로 대폭 늘었다. 이는 국민들의 세금인 공적자금 투입으로 은행의 건전성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국민들의 돈이 은행으로 자꾸 몰려들면서 이 돈을 투자로 이끄는 은행의 금융중개 기능(기업에 대한 전문적 심사·관리 능력을 기초로 자원의 효율성 배분과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은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덩치만 커졌을 뿐, 국내 은행의 자금 운용 행태는 경제의 성장과 선순환을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이는 기업대출의 급격한 감소와 가계대출 급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 대출금에서 차지하는 산업대출금 비중은 1998년 말 75.9%에서 2004년 9월 말 52.3%로 추락했다. 반면 가계대출금 비중은 24.1%에서 47.7%로 증가했다. 하나은행의 경우 과거에 시중은행보다 더 많이 중소기업대출을 했던 충청·보람은행을 인수했지만 중소기업 대출 비중은 1998년 46.8%에서 합병 이후인 2002년 31.4%로 줄었다. 제일은행은 1997년만 해도 중소기업 대출 비중이 50%대였지만,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된 이후 23%대로 떨어졌다. 한국씨티은행으로 바뀐 한미은행 역시 2000년 칼라일펀드가 지배권을 장악하면서 중소기업 대출이 60%에서 40%대로 떨어졌다.

이처럼 가계대출을 늘리고 기업대출을 줄이는 등 ‘비생산적 분야’로의 대출 붐을 선도한 건 외국 자본이 인수한 은행과 대형 은행이었다. 제일은행의 경우 원화대출금 중 가계대출 비중은 1998년 17.5%에 불과했으나 뉴브리지가 경영권을 인수한 2000년에 무려 49.1%로 대폭 증가한 뒤 2003년 말 67.8%에 달했다. 이처럼 외국계 제일은행이 불붙인 소매금융 위주 영업에 국민·우리은행 등 대형 은행은 뒤쫓아가기 바빴다. 1998년 말과 2003년 9월 말 사이의 가계대출 증가율을 견줘보면, 외국계 은행은 기업대출을 33.3% 줄인 반면 가계대출을 35.2% 늘렸고 내국계 은행은 기업대출을 24.8% 줄이고 가계대출을 26.4% 늘렸다. 한밭대학교 조복현 교수(경제학)는 “은행 대형화와 해외자본 유치를 추구한 금융개혁이 되레 생산적 투자를 위한 자금 흐름을 막고, 가계대출 위주 영업으로 부동산 투기와 주택가격 폭등만을 낳았다”며 “대형화가 선진 금융기법은커녕 기업 재무제표만 달랑 컴퓨터에 집어넣어 대출을 심사하는 기계적인 신용평점 모형을 확산해 중소기업 자금조달을 더 위축시켰다”고 말했다. 자금 배분의 왜곡만 낳고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약화했다는 점에서 은행산업 재편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위험분담도 기피한다

정부가 추진한 은행 대형화가 왜 중소기업 대출 축소를 가져온 것일까? 한국은행 강종구 연구위원(금융경제연구원)은 “인수·합병을 거치면서 대출 담당자와 심사역의 해고·이직 등으로 인해 거래하던 중소기업 관련 정보가 소실되고, 대형화 이후 주주가치만을 중시하는 경영에 따라 은행이 가계담보대출과 국공채 등 안전자산에만 투자하면서 기업대출이 급속히 줄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의 고유 역할은 자금 수요자인 개별기업과 장기적 고객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기서 획득한 정보 생산을 기반으로 미래 성장성이 높은 중소기업과 우수 투자 프로젝트를 선별해 자금을 공급하는 ‘관계대출’에 있다. 그러나 몸집이 커진 은행마다 관계대출을 버리고 모든 기업에 표준화된 대출심사 기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중소기업대출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강 연구위원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은행 연간 패널자료를 사용해 은행산업의 구조적 변화가 미친 영향을 실증 분석한 결과 외국인지분율이 상승하고 대형화·겸업화가 진전될수록 중소기업대출 기능은 약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 대형 은행들이 '은행 전쟁' 은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11월 1일 국민은행 강정원 신임행장의 취임 회견. (사진 / 한겨레 임종진 기자)

은행에 방카슈랑스 판매와 펀드 판매 등을 허용한 정부의 겸업화(금융권 업무영역 파괴) 정책도 기업대출을 감소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다. 이자 부문(기업대출)보다 수익성이 더 높은 다양한 금융상품을 팔 수 있게 되자 은행들은 인적·물적 자원을 비이자 부문(수수료·금융상품 판매·유가증권·파생상품 등)에 쏟아부었다. 대형 은행마다 펀드와 방카슈랑스 판매에 올인하면서 은행에서 판매된 펀드 규모는 2000년 말 8조8천억원에서 지난 9월 말 41조8천억원(금융권 전체 펀드 판매액의 25.2%)으로 급증했다. 반면 중소기업대출은 급격히 위축됐다.

은행의 주주가치 경영도 마찬가지다. 단기 실적에만 집착하는 주주를 상전처럼 떠받드는 은행은 장기 투자로 간주되는 기업대출을 기피하게 됐고, 경기가 좋을 때는 주택담보대출을 확대하고 경기가 나빠지면 중소기업대출을 마구 거둬들이는 경기순응적 자금 운용을 하고 있다. 주주가치 극대화 논리에 빠져 최소한의 위험분담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주주가치가 ‘1주1표’라는 민주적 가치로 포장돼 있지만, 우리나라 제조업 설비투자 재원 기여도가 0.2%(2004년)에 불과한 주주들이 은행의 수익을 몽땅 따먹고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들은 죽어나고 있는 형국이다. 제조업의 경우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산액(50.8%)과 부가가치(51.7%)에서 절반에 이르지만, 은행의 민간기업 원화대출금에서 중소기업에 빌려준 돈은 2.5%에 그치고 있다.

물론 한쪽에서는 과거에 관치금융으로 금융시장이 억압당했다는 이른바 ‘금융억압’ 논리를 내세우고 “은행도 장사하는 기업이라서 대출해준 돈을 떼일까 염려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생산적 투자자금은 리스크를 안고 있는 ‘인내하는 자본’이고, ‘투자는 미친 짓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투자에는 위험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김용기 수석연구원은 “국민경제에서 은행의 중요성 때문에 정부가 예대금리차를 통해 은행의 수익성을 보장해주고 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봉착하면 정부가 최후의 대부자로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등 은행의 수익과 영업은 정부 보호와 깊은 관련이 있다”며 “주식시장의 개인들은 고위험 투자를 감당하기 힘들고, 따라서 위험의 통합관리 기능을 갖는 은행이 불특정 다수 국민들의 저축자금을 기업에 제공해 경제의 효율성을 증대하는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주식·채권시장, 은행 다 망가지고…

그러나 덩치를 키운 은행들은 상대적으로 위험이 큰 중소기업에 대한 새로운 금융기법을 찾기보다는 수익성 위주의 ‘안전빵’ 자금 운용에만 치중했다. 일반은행의 총자산 중 국공채 투자는 1997년 34.2%에서 2002년 58.7%로 대폭 늘었고, 중소기업한테는 신용보증서를 끊어와야만 돈을 내줬다. 이에 따라 신용보증기관의 신용보증 규모는 1997년 17조원대에서 2003년 50조원대로 대폭 늘었다. 금융산업노조 김기준 정치위원장은 “은행들한테 수익성 위주의 영업을 독려하고, 기업대출 위험가중치는 높이고 가계대출 위험가중치는 낮게 잡아 기업대출을 줄이도록 유도한 당사자가 바로 정부”라며 “요즘 이헌재 부총리가 은행한테 왜 기업대출 안 하냐고 다그치는 건 한편의 코미디”라고 말했다.

△ 한미은행을 인수한 한국씨티은행의 출범으로 수익성만을 좇는 은행 전쟁은 더 격화될 전망이다. 하영구 행장(왼쪽에서 세 번째) 등 한국씨티은행 임원진. (사진 / 한겨레 이정용 기자)

그런데 “자본시장이 발달해 기업들이 주식시장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은행에 기업대출을 요구하는 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과연 그런가? 정부는 지난 2002년 ‘금융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 주식시장 중심의 자금순환 체계 구축’(재정경제부)을 표방했다. 금융의 중심축을 주식시장과 주주가치로 이동시키는 정책 방향에 따라 정부는 돈이 주식·채권으로 흘러가게 만들기 위해 은행 저금리를 유도했고, 저금리로 은행의 수익성이 악화되자 이를 보전해주기 위해 은행에 다양한 금융상품 판매를 허용했다. 그러나 자본시장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정부의 의도와 달리 주식시장은 기업의 자금조달처 기능을 못한 채 투기적인 자금유통처 노릇만 하고 있다.

주식시장을 통한 기업 자금조달액(유상증자·기업공개)은 1999년 41조원을 정점으로 2000년(14조원)부터 대폭 줄어 올 상반기에는 4조원에 그쳤다. 특히 중소기업의 주식시장 자금조달액 비중은 1999년 3.9%에서 2003년 0.5%로 뚝 떨어졌다. 조복현 교수는 “정부가 기업자금 조달은 주식시장에 맡기고 은행은 금융 부티크처럼 백화점식 영업을 하도록 정책을 폈지만 주식시장의 자금 조달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며 “설비투자자금 조달 측면에서 주식·채권시장, 은행 모두 망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설비투자 부진의 원인으로는 투자심리 위축 등 여러 가지가 꼽히고 있지만, 은행의 기업금융이 마비되면서 설비투자의 경제성장 기여율은 70년대 20% 수준에서 외환위기 이후 거의 제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설비투자 부진이 은행의 구조적 재편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시중은행들은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올 상반기에 사상 최대 순이익을 냈다. 그러나 이런 호황이 대형화와 외국 자본 유치에 따른 은행 경쟁력 강화 때문일까? 사상 최대 이익은 금융기법 선진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예대마진(대출이자와 예금이자 차이) 확대와 수수료 신설을 통해 고객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누린 실적일 뿐이다. 은행들의 평균 예대마진은 1996년 0.42%포인트에서 올 9월 2.23%포인트로 크게 확대됐다. 2001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18개 은행이 신설한 수수료는 233건, 수수료 인상은 757건에 달한다. 이에 따라 은행권 수수료 이익은 지난해 6월 말 1조9천억원에서 올 6월 말 2조7천억원으로 대폭 늘었다. 저금리임에도 돈이 은행으로 몰리면서 은행마다 국민들을 상대로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를 한 셈이다.

오직 돈 많은 사람들만 대접하는가

특히 시중은행들이 소매금융에 치중하면서 상호저축은행·새마을금고·신협 등 서민 금융기관은 영업 기반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은행자산 대비 서민 금융기관 총자산은 1998년 말 32.2%에서 지난해 말 20.6%로 떨어졌다. 조복현 교수는 “은행 대형화 이후 담보 능력이 떨어지는 저소득층은 은행 접근이 더 곤란해졌는데, 사금융 이용자와 카드론 이용자의 급격한 증가가 이를 말해준다”며 “은행이 오직 돈 많은 사람들만 대접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 무차별적 은행 대형화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괴리만 초래했다? 지난 11월9일 국민·주택·국민카드 노조의 통합 조인식. (사진 / 국민은행)

정부는 은행의 구조재편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보고 벌써 ‘동북아 금융허브’ 육성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금융 주권이 상실되고 있고, 무차별적인 은행 대형화가 시너지 효과를 내기는커녕 금융과 실물경제, 저축과 투자의 연결고리를 끊어놓고 있다. ‘은행 전쟁’이니 ‘금융허브’니 말하기 이전에 은행이 경제의 핏줄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때다. 지금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뒤틀린 은행산업은 우리 경제를 멍들게 하는 ‘구조’로 정착될 것이다.

		투기펀드만 떼돈 벌었다 한미·외환·제일은행 인수했던 외국 자본들의 희한한 재테크 능력 현재 외국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국내 시중은행은 3개(제일은행·외환은행·한국씨티은행)다. 제일은행은 뉴브리지캐피탈에 팔렸고 그 뒤 한미은행은 칼라일펀드에, 외환은행은 론스타펀드에 매각됐다. 모두 은행업을 제대로 해본 경험조차 없는 투기펀드들이다. 그러나 외국 자본이 국내 은행을 인수할 당시 외자 유치가 급박했던 건 아니다. 제일은행이 매각되던 1999년 말 국내 외환보유고는 760억달러로 이미 충분한 상태였다. 제일은행의 경우 영업 기반도 없는 미국에서 이사회가 열리는 희한한 풍경도 나타났고, 사외이사 상당수가 제일은행 거래통장조차 없는 미국인들이며 사외이사 월급 통장을 내놓으라는 금융 당국의 요구를 거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은행 중 처음으로 외국자본에 팔렸던 제일은행은 다시 매각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제일은행 대주주인 뉴브리지캐피탈은 “현재 잠재적인 매수자들과 사전 협의를 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유력한 잠재적 매수자는 홍콩상하이은행(HSBC)으로 알려진다. 뉴브리지캐피탈은 2000년 주당 5천원에 제일은행 지분 51%를 인수(투자액 5천억원)했다. 현재 제일은행 매각협상에서 협상 가격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만5천∼1만7천원선에서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주당 최소 1만원에 매각될 경우 뉴브리지캐피탈은 100%의 차익을 거두게 되고 1만5천원에 매각될 경우 수익률 200%를 거두게 된다. 올 초 씨티은행에 한미은행 지분을 매각했던 칼라일펀드의 경우 3년3개월 만에 수익률 145%(차익 7017억원)를 챙겨 떠났다. 그러나 칼라일은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기고도 국가간 이중과세방지협정에 따라 세금 한푼 안 내고 떠났다. 뉴브리지캐피탈도 자본이득에 대한 과세 없이 수천억원을 벌어 떠날 것으로 보인다. 수익률 1%를 올리기 위한 피말리는 0.1초의 승부가 펼쳐지는 금융시장에서 뉴브리지는 인력 감축 등을 통해 제일은행 매각 가치를 극대화한 뒤 떼돈을 버는 셈이다. 이처럼 은행산업에 진출한 해외 자본은 유상감자, 고배당, 매각차익으로 수천억원을 벌었다. 반면 제일은행에 17조6천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정부는 뉴브리지와 같은 비율의 주식을 같은 가격에 넘겨야 하는데, HSBC가 1만5천∼1만7천원에 인수한다 해도 최소한 5조원 안팎의 돈을 날리게 된다. 현재 외환은행 대주주인 론스타도 은행을 팔기 좋은 매력적인 매물로 만들기 위해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