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권력이 겁내는 대한민국 대표 시민단체 ‘참여연대’ 10돌… ‘권력감시’ 최정점에서 새로운 10년을 준비한다
▣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 장면 1
지난 8월24일, 각 정부부처에는 참여연대 명의로 된 ‘부정부패 공직자 명단 통보’라는 전자우편이 전송됐다. 부정부패 공직자 명단을 작성했다는 내용에 공직 사회는 발칵 뒤집혔고, 참여연대 전화통에는 불이 났다. 결국 국가정보원 산하의 사이버안전센터가 “사이버 공격에 대한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해 벌인 사이버전 모의훈련”이었음을 고백했다. 참여연대는 발끈했고 국정원은 망신당했다.
# 장면 2
지난 9월1일 오후, 서울 안국동 참여연대 앞에 설치된 북한주민돕기 모금함이 ‘테러’를 당했다. 누군가가 쥐 잡는 찐득이에 바퀴벌레 수십 마리를 붙여 모금함 투입구에 붙여놓았다. 다행스럽게도, 비위 좋은(?) 안진걸 참여연대 회원참여팀장이 먼저 발견한 덕에 조용히 처리됐다. “참여연대를 싫어하는 분인가 보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표정은 씁쓸했다.
권력감시 · 이슈선점, 그들의 성공비결
9월10일로 10돌을 맞은 참여연대는 국정원이 이름을 훔쳐쓸 만큼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다. 서울 용산 홍등가의 허름한 사무실은 종로구 안국동의 번듯한 벽돌건물로 대체됐고, 이제는 아침마다 책상 위에 널린 쥐똥을 치우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10여명에 불과하던 상근자는 50여명이 됐고, 애초 300여명의 회원은 이제 40배가 넘는 1만3천여명에 이른다. 물론 커진 규모와 영향력만큼 참여연대를 향한 비판도 거세다. ‘제5부’ ‘시민권력’ 등 비판의 화살과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바퀴벌레를 하나하나 모아 찐득이에 붙여놓을 만큼 ‘정성스레’ 미워하는 이도 많다. 그러나 참여연대에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참여연대가 창립 10년 만에 시민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자리매김했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참여연대의 ‘성공비결’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권력 감시’라는 새로운 화두와 이슈의 선점, 전략적인 사업 배치는 참여연대 성장의 주요 배경이다.
경실련이 ‘경제 감시’에 치중했다면, 참여연대는 행정·사법·입법을 총괄하는 ‘권력 감시’ 기능을 주장했다. 시민이 직접 참여해 권력을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개혁을 추동해내는 것, 사회권까지 확장되는 인권 문제를 포괄해내는 것은 창립 취지이자 목표다.
‘참여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참여연대는 매년 정치·사회적 흐름에 맞게 전략사업을 세우고 역량을 배치했다. 창립 초기인 1994~95년에는 일상적인 사법·의회 감시 활동 외에 사회복지 개혁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국민생활최저선 운동을 시작했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노령수당 지급 연령을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전국 21만 영세 노인이 3만원씩 더 받도록 한 것은 지금도 뿌듯해하는 일이다. 1996년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이후 반부패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참여연대를 상징하는 사업으로 만들어냈다. 당시 각 부서에는 담당간사가 1명뿐이었지만, 반부패운동을 담당했던 맑은사회만들기본부에는 전략적으로 4명이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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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액주주들의 위임을 받아 삼성전자의 주주총회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는 김기식 당시 정책실장(오른쪽)과 고려대 장하성 교수. 1997년부터 시작된 소액주주운동은 참여연대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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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로 들어간 1997년부터는 소액주주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가며,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던 재벌의 전횡을 견제하고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를 주장했다. IMF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던 서민들에게, 소액주주의 위임을 받고 SK와 삼성 주주총회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는 참여연대의 모습은 위안이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15대 국회 막바지가 ‘식물국회’ ‘방탄국회’로 전락하면서 국민들의 정치개혁을 향한 열망이 끓어오르던 지난 2000년, 참여연대는 총선시민연대를 주도하면서 “정치개혁을 선도하는 단체”라는 이미지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여기에 “역사가 참여연대를 만들어냈다”라는 분석을 덧붙인다. 조 교수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정치개혁과 사회 변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점차 거세지는 상황에서, 참여연대가 국민들의 목마름을 잘 대변하고 이를 운동에 반영했다. 또 정치 영역에서 변화가 지체되는 구조적인 상황에서 참여연대가 ‘대의기관의 대행’ 역할을 하면서 급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시대적 행운”이라는 설명이다.
실사구시적 접근과 ‘불독정신’
참여연대는 또 소송과 청원이라는 새로운(?) 운동방식을 통해 법과 제도 개선이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지난 10년간 참여연대가 제기한 입법 청원은 110건, 공익소송 및 고발 195건, 정책토론회 300여건에 이른다. 강자의 전유물이자 억압의 도구이던 법률을 개혁과 운동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낸 것이다. 이런 특성은 참여연대의 구성과 무관하지 않다. 참여연대는 세 가지 다른 그룹의 결합체다. 1990년대 초반 “구체적이고 제도 개혁적인 운동”을 주장하던 박원순·차병직 변호사 등 인권변호사·법학자 그룹이 첫 번째요,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외치던 조희연·김동춘 교수 등 비판적 사회과학자 그룹이 두 번째다. 여기에 새로운 운동을 고민하던 학생운동권 출신 젊은이들이 모인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연합’의 김기식 사무국장 등 활동가 그룹이 세 번째 결합주체다. 재야 사회과학자들이 이론적 바탕을 세우고, 법률가 그룹이 법이라는 구체적인 수단을 통해 소송·청원을 하면 이를 활동가그룹이 받아서 여론을 조직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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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사무처장을 맡은 박원순 변호사가 참여연대 창립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정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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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초기에 “소송으로 흥한 자, 소송으로 망한다” “참여연대는 고발연대”라는 등 일부의 비아냥도 있었지만, 공익 소송을 통한 문제제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점을 폭로했고, 입법 청원을 통해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가임대차보호법, 부패방지법 제정 등 참여연대의 대표적인 운동이 모두 소송→입법 청원→제도 개선이라는 ‘참여연대 운동원칙’에 충실한 결과물이다.
여기에는 참여연대 특유의 ‘실사구시’식 접근과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불독 정신”도 한몫했다. 치열하고 끈질긴 싸움 끝에 부패방지법은 6년 만에, 증권집단소송제 입법은 7년 만에 ‘성공’했다. 조세 형평성 제고를 위한 제도개혁운동을 전개해 상속세와 증여세법이 완전포괄주의로 개정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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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연대는 박원순 변호사(왼쪽) 등 법률가 그룹과 조희연 교수 등 사회과학자 그룹, 학생운동권 출신 활동가 그룹이 결합돼 탄생했다. 특히 박원순 변호사는 변호사직을 내던지고 7년 동안 상근 사무처장을 맡으며 참여연대를 키워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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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시 무엇보다 ‘사람’이다. 현재 아름다운 재단의 상임이사인 박원순 변호사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변호사직을 내던지고 상근 사무처장을 맡으며 참여연대를 키워냈다. 이런저런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온 실무 간사들과 정치적 야욕 없이 순수하고 희생적인 임원들 모두 참여연대의 소중한 자산이다.
여기에 참여연대를 지탱하는 1만3천여명의 회원들은 참여연대의 존립 근거를 말해준다. 대부분이 매달 5천원, 1만원씩 회비를 내는 ‘풀뿌리 회원’들이지만, 회비 납부율이 80%에 이르는 진성회원들이다. 수만명씩 회원을 ‘거느린’ 단체들도 있지만, 회비 납부율이 20~30% 안팎에 불과하다. 회원사업은 참여연대 활동의 본질이기도 하다. 참여연대의 재정 자립과 활동, 상근자 복지 등이 전적으로 회원에게 달려 있다 보니, 회원사업에 열심일 수밖에 없다. 참여연대 시민참여팀은 참여연대에서 가장 많은 7명의 상근자가 투입됐다. 매달 신입회원을 맞이하는 ‘신입회원한마당’이 열리고, 회원뉴스메일, 시민학교, 인턴십 프로그램 등 참여연대 초기부터 회원관리 부서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써왔다. 여기에 학습모임부터 친목모임까지 회원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모임은 16개에 이른다. 안진걸 회원참여팀장은 “참여연대의 회원들은 ‘시민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참여연대의 주장을 몸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소액주주운동이 시작된 1997년부터 총선시민연대가 활동한 2000년까지 신규회원 수는 663, 1794, 2875, 5422명으로 매년 2배 가까이 급증하며 순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2000년 총선시민연대를 정점으로 신규 회원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특히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참여연대의 회원 수는 급감하는 추세다. 시민단체의 권력화, 정치적 편향 시비 등 비판이 확대되고 경기불황이 이어진 탓이다.
신규회원 감소… 개척자는 고민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규회원의 급감은 참여연대의 고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0년 만에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시민의 권리의식이 꾸준히 성장하고 참여통로도 다양화된 만큼, 지금까지 시민의 ‘대변자’를 자임해오던 참여연대 운동 방식에도 큰 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또 1997년의 경제위기 이후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국가 대 시민사회의 대립 구도가 이제는 시민사회 내부의 중층적인 갈등 구조로 변해가는 등 급격히 달라지는 사회 흐름에 적응해내는 것도 고민이다.
역설적이게도 사회가 정상화될수록 참여연대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진다. 참여연대가 국민적 지지를 받으면서 위력적으로 활동하던 ‘개척 시대’는 끝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최고 정점에 선 참여연대는 내리막길로 들어설 것인가, 새로운 봉우리로 가는 길을 개척해낼 것인가. 두고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