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언론 통폐합 이후 최초 · 최대의 조직개편 단행한 KBS, 그 숨죽인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아직 새 명함을 만들지 못해서….”
대부분 명함을 내밀 때마다 말꼬리를 흐렸다. ‘주간’이라고 쓰여 있지만 이젠 팀원이고, 예전엔 ‘국장’이지만 이젠 팀장이고, 서로 부를 땐 예전의 ‘부장’이란 호칭을 그대로 쓰지만 실제로 부장은 아니고. 호칭에 대한 설명이 한참 따라붙었다.
“아직 사무실 팻말을 바꾸질 못해서….”
사무실 촬영을 위해 잠깐 제2라디오국에서 만난 성대경 팀장 역시 말꼬리를 늘였다. 사무실 천장엔 2라디오, 2FM, 라디오드라마 기존 3개 부서의 팻말이 그대로 걸려 있다. 그 3개 부서를 거느리는 국장이었던 그는 8월9일자로 2라디오 1개 팀을 책임지는 팀장이 됐다. 국장님으로 불리다 갑자기 팀장님 된 기분이 어떻냐고 묻자 그는 잠깐 주저하다 “현장 PD들을 직접 챙기니 젊어진 느낌”이라고 답했다. “예전엔 PD들의 큐시트(cue-sheet·사전 취재기획안)를 차장-부장 선에서 결재하고 국장은 일일이 프로그램을 챙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팀장이 직접 큐시트를 결재하고 코멘트를 해준다. 오전엔 팀원들을 모아놓고 직접 아침 임원회의 결과를 알려주기 때문에 팀원들이 경영 방침 등 회사일에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
286개 국과 부서가 116개 팀으로 정비
그는 예전엔 국장-부장-PD가 3:2:5의 비율로 책임지는 구도였다면, 이제는 팀장-팀원이 5:5로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구도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여러 사람에게 책임이 분산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팀원들이 더 완결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도록 스스로를 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8월20일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KBS) 본사를 찾았다. 조직 개편이 시행된 지 갓 열흘을 넘긴 KBS는 아직 어수선해 보였다. 새 명함도 나오지 않았고 호칭도 정리되지 않았다. 변화된 팀제에 맞춘 업무 지침도 19일에야 나와 아직도 결재 라인이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눈에 띄는 변화라면, 부장 자리가 없어지면서 평사원들과 90도 방향으로 돌려두었던 부장 책상이 일렬로 나란히 배치됐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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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발이 부족한 가분수형 머리. 기형적 조직으로 비난받던 KBS가 환골탈태했다. 조직의 효율성을 높여 공영방송으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사진/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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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개혁추진단이 발족된 이후 KBS는 여러 차례 큰 변화들을 단계적으로 겪어왔다. 2003년 11월에 차장 직위 폐지·직위와 직급의 분리를 뼈대로 하는 인사제도 개선이 노사 합의로 이뤄졌고, 올해 1월 말엔 글로벌센터·디지털미디어센터 등 신설 등 센터 조정이 진행됐다. 그리고 8월9일엔 드디어 팀제 개편이 현실로 구현됐다. 지난해 11월 경영·기술·보도·제작 등 전 직종이 망라된 부문별 위원회가 꾸려진 뒤 70여 차례의 회의 등을 거치며 얻어낸 결과였다. 팀제 개편에 앞서 7월29~30일과 8월3일엔 센터장과 팀장급 인사가 났다. 이로써 국장급 124명, 부장급 334명, 차장급 663명 등 모두 1121명에 이르던 간부가 186명(본부장·센터장·팀장 등)으로 대폭 줄었다.
3류 방송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감
본사는 기존의 286개 국·부서가 170개 줄어 6본부 5센터 116팀으로 간소해졌고, 지역의 경우 기존 16개 지역권 가운데 여수·남원·군산·공주·영월·태백·속초 등 7개 지역국이 폐지됐으며 이 과정에서 190개 국과 부서가 48개 팀으로 정비됐다. 80년 언론 통폐합 이후 내부적으로 단행된 최초이자 최대의 조직 개편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KBS 사내온라인 게시판(KOBIS)에 몇 차례 개혁 방향에 대해 회의적인 글들이 올라왔으나 그런 글들조차도 조직 개편과 지역국 통폐합에 정면으로 반대하기보다는 시간에 쫓기듯 허둥지둥 진행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변화가 대세라는 것을 구성원 모두 공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 김영삼 언노련 KBS본부 위원장(왼쪽)은 “구성원의 높은 개혁 열망이 조직 개편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박상재 변화관리팀장(오른쪽)은 “건강한 경쟁구조 안착이 팀제의 성공조건”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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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하 언노련) KBS본부 김영삼 위원장(KBS 9대노조 위원장)은 이번 조직개편은 노사가 쌍두마차로 이끌어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에 바꾸지 않으면 외부에서 칼이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컸습니다.” 지난 5월 감사원은 특별감사를 통해 KBS가 상위직이 하위직보다 많고, 예비비를 전용해 특별성과급을 지급했으며 사내복지기금에 과다 출연하는 등 방만한 경영을 해왔음을 지적했다. 감사 결과는 당연히 조선·중앙·동아에 의해 확장·증폭됐다. ‘외환위기 이후 KBS 인력변동 현황’ 등의 그래프를 첨부해가며 1억원씩 연봉을 받으며 빈둥대는 간부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국민들의 수신료를 꼬박꼬박 받아먹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묘사한 것이다. 당시 KBS는 반박 자료를 내며 맞섰지만(가령 상위직이 하위직보다 많다는 비판에 대해선 상위직에 5년 이상 입사자까지 포함하는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공룡조직’ ‘철밥통’이라는 인상을 완전히 털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2002년 말 9대 노조가 뜨면서 ‘낙하산식 사장 인사 폐지’를 외쳤고 이에 한목소리가 모아져 서동구 사장을 퇴진시켰던 것입니다. 비록 낙하산 인사 관행 자체는 없애지 못했지만 노조가 바랐던 개혁적 인물이 사장으로 선임됐고, 이로써 노사가 함께 조직개편을 추진할 동력을 얻게 됐습니다.” 노조는 실제로 조직개편이 이뤄지기까지 중요한 고비에서 목소리를 냈다. 조직개편 설계 작업이 진행되던 지난 5월 팀장-팀원 체제가 조직의 안정성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에 팀제 개편은 국장-팀장-팀원 체제로 다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러자 노조가 앞장서 “이는 사실상 부를 팀으로 바꾸는 무늬만 개혁”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팀제는 노조의 요구대로 팀장-팀원으로 관철됐다. 그렇다면 노조는 왜 이처럼 조직 효율을 꾀하는 작업에 발벗고 나선 것일까. 종래의 관행대로라면 노조는 효율화를 외치는 회사에 맞서는 입장이 아니던가.
KBS PD 출신인 권오훈 언노련 정책국장은 “본래 팀제 개편은 경영 합리화를 위한 신자유주의 전략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KBS처럼 관료주의가 현장의 자발성을 해치는 구조에선 효율화가 오히려 필요했다. 이대로 나가다간 3류 방송이 된다는 절박감이 팽배했다. 게다가 이건 사람을 자르는 게 아니라 직무 재배치를 통한 효율화다(공사법에 따라 KBS는 정년이 보장된 사원을 해고할 수 없다). 피 같은 국민의 돈을 방만하게 쓴다는 것은 부도덕한 일 아닌가.” 그는 “과거엔 ‘차장고시’라고 불리는 차장승진시험에 입문하면서부터 관리직 간부가 최고의 인생 목표처럼 여겨온 게 KBS의 조직문화였다”면 “이제는 더 품질이 좋은 방송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는 것으로 조직의 목표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직제 개편은 사실상 조·중·동이 그토록 애타게 촉구했던 구조개선인데 막상 팀제가 이뤄지자 이번엔 간부의 옷을 벗겨 모두 평사원으로 되돌려버리는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못박았다.
그렇다면 노조가 쌍수를 들고 환영한 경영 효율화는 현장에서 어떻게 먹히고 있을까. 기존에 비효율적 직위를 차지하고 있던 간부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또는 같은 라인에서 뛰게 된 후배 기자들은 갑작스레 동료가 된 선배들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팀장 발령, 아무도 축하인사를 안 하더라
입사 15년차로 차장급에 해당하는 한 PD는 “팀제의 원론적 취지에 따르면 국장·부장급도 팀원으로 내려와 필요하면 AD까지도 맡을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분들께 AD를 맡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번 팀제 전환의 인상적인 풍경으로 “팀장 발령날 때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축하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을 꼽았다. “내용상 팀장 맡아서 승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너무나 조용했다. 그만큼 겉으로 드러나는 반응들은 거의 없다. 인상 비평만으로 보자면, 국장·부장급이 워낙 충격을 받았다. 이미 뺏길 것을 다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입사 15년차로 조직의 허리에 해당하는 그는 이번 팀제 전환을 지켜보며 후배와 선배 사이에 인식 차이가 이토록 심하다는 데 놀랐다고 한다. “후배들은 선배들을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으로 단정하고,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현업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냐고 본다. 선배들은 우리가 기득권을 누린 것이 뭐가 있느냐고 생각한다.” 그는 “선배들의 박탈감을 감싸주려면 수고했다는 카드라도 한장 보내줬어야 했는데 회사도 노조도 무신경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팀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선배 팀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존에 차장·부장이 하던 게이트키핑 기능들은 선배 팀원들이 할 수밖에 없다. 선배 팀원들이 얼마나 일을 잘해주느냐에 따라 팀제의 성패가 달렸다. 예전에는 차장, 부장으로 일하면서 직책도 얻고 직책수당도 받았다. 지금은 보상 없이 일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선배들이 그런 인식을 못하는 것 같다. 인사평가와 보상체계가 잘 정립돼야 한다. 이것이 요체다. 잘못되면 팀제가 후퇴할 수 있다.”
10년차 PD로 후배그룹에 속하는 한 PD도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10월에 예정된 가을 개편이 지나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예전엔 CP(Chief Producer·책임프로듀서)가 프로그램 틀을 짜고 스튜디오 조정 같은 잡무를 처리해주었다. 이제는 그런 코디네이션 기능이 없어졌다. 현장 PD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과연 팀원들이 얼마나 소통을 잘하면서 프로그램 틀을 짜갈지가 관건이다.”
이번 인사에서 국장에서 팀장으로 ‘살아남은’ 27년차 간부는 “이번에 현장으로 돌아간 부장들 중엔 기회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는 이들이 많다. 어차피 변화할 수밖에 없으니 적응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입사 21년차로 팀제 개편 이후 잠시 관리자 역할을 하다 다시 팀원이 된 한 PD는 “팀제의 성과가 미흡하면 잠복해 있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이라며 “현재 KBS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종기와 같다”고 표현했다. “직위는 없어져도 업무는 없어질 수 없다. 선임 팀원으로 자기 프로그램 연출을 하면서 예전에 CP가 하던 기능도 해야 한다. 업무는 늘어났지만 보상은 줄어들었다.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가 쌓일 것이다. 적절한 평가와 보상 체계가 만들어지느냐가 팀제 성패를 가르는 핵심이다.” 그는 “진급도 조직운영의 동력인데, 새로운 팀제에선 동기부여를 할 새로운 기준이 제시돼야 한다. 군인은 사기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듯, 방송도 마찬가지다. 조직 전체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일인데 일부 부서에서 실험을 해보는 과도기를 거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결국 지금처럼 조직 전체가 바뀌었다”고 불만을 내비쳤다. 또 그는 “나이 든 사람들은 개혁이 결국 사람 자르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며 “공기업이 퇴출 구조가 없으니까 이벤트를 벌여서 결국 퇴출 구조를 만드려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간부들의 침묵, 체념인가 수용인가
그의 말대로 박탈감을 느낄 법한 기존 간부들은 현재 암중모색 중이다. 입사 7년차의 한 기자는 “크게 소음이 일지 않는 이유는, 정세적으로 판단해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인식과 어차피 정연주 퇴임 이후엔 또다시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때’를 기다리는 심리가 섞여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연 반대하는 이들은 침묵 속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체념’일까 ‘수용’일까 ‘인내’일까. 이런 와중에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하며 7월30일 사내 게시판에 직장협의회 결성을 알리고 가입을 촉구하는 글이 올라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직장협의회는 발족식을 8월 말로 잡고 있으며 가입 회원 수는 외부에 밝히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 1년 동안 개혁추진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가 8월9일 이후 변화관리팀을 이끌고 있는 박상재 팀장은 “앞으로 2달 단위로 팀제 개편에 따른 혼선들을 모아 보고서를 내고 6개월 뒤엔 다시 수정 작업을 거칠 것”이라며 “2005년 1월1일부터 팀별로 급여·인사고과에 따른 인센티브가 도입되는데 이때 건강한 경쟁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