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08월21일 제473호 

전화번호부는 말이 없다

검찰 수사에서 정몽헌 의장은 가혹행위를 당했을까…심한 인간적 모욕감을 느낄 폭언은 있지 않았나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에 대한 검찰의 가혹행위 논란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가혹행위 의혹을 폭로한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2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가 열릴 때까지 검찰이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검찰도 한때 함 의원에 대한 소송을 검토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가혹행위 논란은 현대 비자금 사건의 또 다른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α’ 수사에 쏟아지는 의혹


사진/ 8월11일 민주당 함승희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고 정몽헌 의장이 검찰의 가혹행위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함 의원은 26일 열리는 법사위에서 또 다른 ‘폭로’를 예고하고 있다.(연합)


정 의장은 정말 가혹행위를 당했을까. 이에 대한 함 의원과 검찰의 주장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서 진실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볼 때 정 의장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은 커 보인다. ‘전화번호부 같은 두꺼운 책’으로 머리를 얻어맞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심한 인간적 모욕감을 느낄 수 있는 폭언은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함 의원은 지난 8월11일 국회 법사위에서 검찰의 가혹행위 의혹을 폭로하면서 기자들에게 제보 수집 경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정 의장 사망 직후에 현대그룹쪽의 정 의장 측근한테서 (가혹행위) 얘기를 들었는데 상중에 밝히는 게 부적절한 것 같아서 발표 시점을 기다린 것”이라며 “그 후 공직에 있는 어떤 인사도 똑같은 얘기를 하면서 ‘중대한 문제이니 국회에서 거론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고 밝혔다.

함 의원쪽이 밝힌 구체적인 근거는 이렇다. 정 의장은 대검 중수부에서 지난 7월26일과 29일, 8월2일 등 모두 3차례 조사를 받았는데, 검찰이 특검에서 넘어온 150억원 부분 외에 ‘+ α’(현대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별도로 건넨 돈)를 조사하면서 정 의장에게 인간적 모욕감을 줬다는 것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정 의장이 ‘+α’ 부분을 담당했던 검사실에서 특히 심한 모욕감을 느낀 것 같다”며 “정 의장은 검찰에서 돌아온 뒤 측근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고, 이 얘기가 여러 경로를 통해 정치권에 전달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은 펄쩍 뛰고 있다. 검찰은 함 의원의 의혹 제기가 있자마자 곧바로 수사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며 반박했다. 검찰은 정 의장이 수사 첫날인 7월26일 하루 동안만 ‘+α’ 부분에 대해 조사를 받았고, 나머지 이틀은 150억원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만약 정 의장이 ‘+α’ 조사에서 가혹행위를 당했고 그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게 됐다면, 어떻게 나머지 이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었겠느냐는 주장이다. 대검 중수부 관계자는 “변호인이 수시로 입회해서 정 의장의 상태를 확인하고 식사도 같이 했다”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혹행위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 주변에서는 대검 중수부의 설명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150억원은 이미 특검에서 다 밝혀진 것인데 이 부분을 조사하면서 이틀씩, 그것도 한번에 12시간씩 참고인을 소환 조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는다”며 “수사팀이 새로운 것을 밝혀내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검의 한 간부도 “참고인 조사를 받던 현대쪽 인사로부터 ‘(내가) 잘한 일은 없지만, 제발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게 (수사팀에) 말 좀 잘 해달라’는 하소연을 들었다”며 가혹행위의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수사관의 ‘사고’냐 검찰 길들이기냐


사진/ 5월30일 대북송금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출두하고 있는 정몽헌 의장.(한겨레 강창광 기자)


여권 주변에서는 가혹행위 당사자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대검 중수부에는 아직 옛날식 조사 방식을 선호하는 수사관들이 있는데 이들이 사고를 쳤을 가능성이 크다”며 “일부 중수부 검사들이 이들의 수사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을 통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부터 검찰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는데, 일부 검사들이 계속 ‘오버’하다가 이번에 사고를 낸 것”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당은 검찰이 가혹행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지 않으면 국회 차원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하겠다는 방침이다. 정균환 총무는 지난 12일 한나라당에 진상조사특위 구성을 제안해놓은 상태다. 함 의원은 26일 열리는 법사위에서 또 다른 ‘폭로’를 예고하고 있다. 함 의원의 안정상 보좌관은 “함 의원을 다른 당의 ‘카더라’ 의원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봐서는 안 된다.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검찰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본 뒤 제2, 제3의 폭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회 차원의 조사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의혹이 명쾌하게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단 검찰의 가혹행위를 입증할 객관적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정 의장의 변호인들조차 가혹행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정 의장의 주임 변호사인 이종왕 변호사는 “함 의원의 주장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며 “만약 가혹행위가 있었다면 변호인들이 가만있었겠느냐”고 말했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설사 폭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폭언에 대해 느끼는 모욕감의 정도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며 “따라서 가혹행위로 판단할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민주당과 함 의원의 행태를 ‘검찰 길들이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현대 비자금 수사가 민주당에 미칠 여파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수사 흠집내기라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현대 비자금이 민주당 구주류는 물론 신주류에까지 전달됐다는 수사 결과가 나올 경우 민주당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며 “수사팀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 미리 완충장치를 만들려는 게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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