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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는 왜 ‘경제위기’를 외치나 노무현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을 후퇴시키기 위해 경제위기설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재계
전국경제인연합회·경영자총협회·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5단체는 5월29일 ‘경제위기 타개를 위한 경제계 의견’을 발표했다. 최근의 한국경제 침체국면을 “외환위기 이후 보기 드문 위기상황”으로 규정한 재계는 “경제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대안은 기업의 투자확대뿐”이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삼성·LG·SK·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한 14개 주요 그룹들이 올해 25조9천억원의 시설투자 계획을 갖고 있다고 의욕을 과시했다. 경제 살리기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노무현 정부에 전달한 셈이다. 그러나 그런 투자의욕 뒤에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예정된 투자 집행할 테니 요구 들어달라?
경제위기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탓일까? 화답이라도 하듯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은 투자확대가 시급한 때”라고 했고, 김진표 경제부총리도 “법인세율 인하 검토” 발언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와 재계가 서로 손을 맞잡는 유화국면으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는 형국이다. 경제위기론을 앞세운 재계에 포위당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러나 재벌기업의 시설투자 계획 중 25조1천억원은 이미 올해 초에 세워놓았던 것들이다. 이번에 새로 늘린 건 8천억원(3.1%)에 불과하다. 투자계획은 이미 잡혀 있었는데 시기를 하반기로 미루는 전술적인 ‘투자 재배치’를 통해 재계가 정부와 한판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성공회대 유철규 교수(경제학)는 “어차피 올해 하기로 돼 있던 투자인데도 이라크 전쟁으로 집행을 미뤘다가 이제는 경제위기론을 들고 나오면서 다시 집행을 미루고 있다. 투자라는 위협용 무기를 동원해 개혁을 걸고 넘어지면서 정부 경제정책의 방향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재계가 제기하고 있는 경제위기설은 과연 정확한 진단인가. 경기침체 국면이 의도적으로 ‘위기’라는 말로 과장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계가 위기설을 유포하면서 일부러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요즘의 경제위기론은 국내외 ‘자본’쪽이 제기하고 있는 지배적인 견해다. 그런 점에서 위기론이 생산-유통-소비되는 배경에는 정부의 경제개혁정책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라는 맥락이 숨어있다. 개혁 후퇴를 노린 전략적 고려, 즉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채 경제위기론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위기론의 근거 빈약해
경제위기론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게 스태그플레이션(경기 하강기인데도 물가가 뛰는 현상)의 출현 가능성이다. 그러나 유철규 교수(성공회대)는 “한국경제나 주요 세계경제 모두 과잉생산이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는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현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물가 상승률 3∼4%를 갖고 스태그플레이션을 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위기론의 또 다른 축을 떠맡고 있는 것은 경상수지 5개월 연속 적자다. 그러나 올 1∼3월 무역수지 적자를 들여다보면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주어 오히려 21.5% 증가했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수입이 30.7% 늘었기 때문에 적자를 낸 것인데, 이라크전쟁 이후 유가는 안정을 되찾았다. 물론 경기 급락을 막는 수준의 경기 대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식 복합불황이 우려되는 경제위기”라면서 기업의 투자의욕 고취를 위해 법인세를 인하하라는 재계의 요구에는 경제외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금리 1∼2% 차이 때문에 또는 법인세가 많아서 기업이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재계가 경제위기론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데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재벌개혁으로 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다. 유철규 교수는 “세금·이자부담이 투자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 변화를 염두에 둔 방어적 화두로 등장한 게 재벌기업의 경제위기론이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기업규제의 완전 폐지나 세금면제 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요인이 크다. 그런데도 정치판이 덩달아 재계의 논리에 따라가고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재벌기업들이 틈날 때마다 스스로 ‘비경제적 요인’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도 이런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재계는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는 철학과 적대적 재벌정책 등 현 정부의 이른바 포퓰리즘적 비경제적 조처들이 한국경제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 결과 경제위기까지 터졌으므로 이제 개혁을 접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80년대말 이후 계속 등장한 ‘레퍼토리’
그러나 재계가 말하는 비경제적 요인을 경제침체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잔뜩 위축된 투자와 소비측면을 들여다보면 경제침체를 낳은 주범이 바로 재벌기업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먼저 투자를 보자. 투자위축은 구조적인 현상으로 굳어지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으로 평가한 총수요 가운데 민간투자(총고정자본형성) 비중은 2000년 22.5%, 2001년 20.7%, 2002년 20.2%로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잠재력을 유지·확충하기 위한 사회적 적정수준의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도 금리인하가 경제교과서에 쓰여 있는 것과 달리 기업 투자수요를 일으키지 않는 현상이 한국에도 고착화하고 있다. 기업마다 주식투자자가 요구하는 단기적 성과만을 투자결정의 중요한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법인세를 인하해도 투자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법인세가 줄어 기업이윤이 증가해도 주주 배당으로 소진되거나 자사주 취득 등 주가관리용으로 쓰이기 일쑤다. 이런 재벌기업의 행태를 감안하면 규제를 풀어 투자를 독려해도 별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수출과 함께 경제성장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는 소비 기반은 어떤가.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체감경기를 보여주는 올 1분기 국내 총소득은 -2.0%로 1년 전에 비해 국민들의 소득이 오히려 줄었다. 기업의 구조조정이 임금비용 절감에만 집중된 탓인데, 이런 식의 구조조정은 저임금 비정규직의 급속한 확대로 이어졌고 결국 노동자들이 빚에 의존해 살아가는 ‘지속 불가능한 소비’를 낳았다. 실질임금 향상이 소비를 뒷받침하고 이것이 기업의 수익성도 좋게 하는 원천이란 점을 기업들이 무시해온 것이다. 돌이켜보면 경제위기론은 80년대 말 이후 재벌기업 등에 의해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재계는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한국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았다. 90년 전후로는 노사분규에 따른 총체적 난국설이 대대적으로 유포되었다. 과거의 경제위기론이 경제위기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개혁정책에 그 책임을 떠넘기는 양상이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경상학부)는 “경제위기론을 유포하는 재벌기업은 그 원인을 분배와 경제정책에서 찾을 뿐 생산과 관련된 기업조직, 예컨대 기업 소유지배구조 및 경영투명성 문제는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개혁을 저지시키려는 목적에서 경제위기론이 조성되고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나쁠수록 개혁 가속화해야”
경기 하강기에 오히려 경제시스템을 착실하게 정비해 성장동력과 체질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태동 금융통화위원은 “재계는 경제가 불안하므로 개혁추진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데 거꾸로 경제가 나쁠수록 개혁을 더 가속화해야 한다. 대통령한테 힘이 실리는 집권 초기에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지금 개혁을 미룬다고 재계의 불안감이 가시겠는가? 기업의 투자를 독려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빨리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질이 약하면 작은 추위에도 감기에 걸리게 마련인데, 몸이 으슬으슬할 때 가만 있으면 병이 더 악화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경제는 경제성장률이 -6%대까지 추락했던 1998년 경제위기 속에서도 착실한 개혁을 추진한 결과, 1999년과 2000년에 10% 이상 성장하는 성과를 거뒀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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