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05월29일 제461호 

못해먹겠으니 막해먹겠다?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 해결” 약속도 먼저 어겨… 대통령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갈등 조정은 정부의 기본 업무입니다. 시장의 질서에 따라 움직여야 할 때 정부 개입은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집단간의 가치나 이해관계로 발생한 사회적 갈등은 정부가 적극 나서 조정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한 조정에 그치지 않고 이후 조정의 적절한 시스템과 메커니즘도 개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정부가 할 일입니다.”(노무현 대통령. 3월14일 수석보좌관 회의)

한총련 시위 대응도 부적절

노 대통령에게 정부의 적극적인 사회갈등 조정은 국정운용 원칙 가운데 핵심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언급해왔다. 2월19일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서는 사회갈등 조정의 방향도 공개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한국의 사회질서를 8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면서 “원칙, 신뢰, 공정, 투명, 분권, 자율, 대화, 타협이 그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재구성해보면 이렇게 된다. “사회갈등을 제대로 조정하려면 원칙과 신뢰를 바탕으로 공정·투명·분권의 원칙 아래 자율적으로 대화하고 타협하라.”

최근 그가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한 배경에는 사회갈등 조정이 이런 원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녹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부 힘으로 밀어붙이려 하니…”라고 탄식한 것을 봐도 그렇다.

그러나 시민사회에서는 노 대통령의 최근 언행을 두고 “스스로가 제시한 원칙들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사불란한 획일주의를 배격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면서 이를 대통령 스스로가 어긴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로 꼽히는 것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과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위원장 김창국)가 내놓은 권고안을 둘러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발언이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입장과 인권위의 입장이 다르다면 이를 조정해야 하는 대통령의 입장에서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없애는 발언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국가기관끼리 의견이 다른 것을 두고 엄청난 사고가 난 것처럼 보도하거나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관점은 곤란합니다. 상호견제 속에서 국가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3월27일 수석보좌관 회의)라고 한 기존의 발언과도 어긋나는 언행이었던 셈이다.

한총련 시위에 대한 대응도 부적절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한총련 정치수배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를 밝혔다가, 갑자기 비폭력 시위에 대해 ‘난동’으로 규정해 실마리를 찾아가던 한총련 문제를 꼬이게 했다는 것이다.

갈등 조정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던 노동정책도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대표적인 노동쟁의인 두산중공업, 철도노조 쟁의, 화물연대 파업 등의 처리과정은 기존의 ‘사용자 편향적’이며 ‘전투경찰 동원형’이었던 노동정책에서 일정 부분 벗어났다는 평가를 들을 만했다. 그러나 최근 노 대통령의 강경 발언이 이어지면서 나온 국가위기관리특별법 제정 움직임은 기존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놓은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특별법 제정은 전체주의적 발상”


사진/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수립이라는 새 정부의 노동정책이 급속히 보수화하고 있다. 사진은 화물연대 파업모습.(류우종 기자)


특히 특별법 제정은 “이미 기간산업에 대해 정부의 파업중지 명령권이 보장돼 있는 마당에, 여기에 더해 대통령에게 파업중단 명령권을 다시 부여하는 것으로 상상하기 힘든 악법 제정 의도”라는 비난을 받았다. 시민사회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써가며 이에 반대하고 있다.

임기가 1825일인 노 대통령이 취임 100일이 채 지나지 않아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데 대해 노동계의 한 관계자는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은 노 대통령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DJ에서 노무현으로 권력이 바뀐 것을 그냥 계승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조금 더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이를 대중은 대단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은 약간의 틈만 보이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볼 수 없을까 하는 심리와 욕구를 지니기 마련이다. 이는 지배세력에 약간의 변화와 이완이 있을 때마다 역사적으로 되풀이돼왔던 것이다. 화물연대는 시작일 뿐이었다. 다른 쪽도 준비만 되면 뭔가를 하려 할 것이다. 많은 일이 일어나게 돼 있다.”

노동계는 6월 중순까지 전교조를 비롯해 전국공무원노조, 서울시내버스노조, 선물거래소노조, 각 은행 노조, 건설운송노조, 서울도시철도노조 등의 ‘줄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와 노동계의 ‘대회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정부가 지난 4월15일 정리한 사회갈등 24개 과제(표 참조)를 보면 정부가 개입해 조정해야 할 것들이 끊임없이 생길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갈등이 다양하게 불거질수록 애초 약속했던 ‘사회갈등의 조정 원칙’의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사회갈등의 조정을 참여민주주의 방식으로 하자고 공언했지만 최근 진행되는 사안들을 보면 의견수렴 과정은 생략된 채 일단 시행해보고 보완하자는 식이 많다”면서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되면 노 대통령 자신의 표현대로 ‘막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갈등 조정의 기준이 ‘대통령의 말’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의 시스템과 매뉴얼’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어가는 상황이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 “신경질 부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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