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3년04월17일 제455호 

맨발이냐 바퀴냐!

마라톤 넘보는 인라인 스케이트… 달리기의 세대교체 이뤄지는가




봄이다.

생명의 기운이 담긴 봄바람은 달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 인간은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할 때부터 달렸다. 800만년 인간의 역사를 1년치 달력으로 만들면 인간은 5월17일께 직립보행을 시작했고 그 후 12월31일까지 내리 달렸다. 그동안 인간의 뇌는 달리기를 끊임없이 프로그래밍해왔다. 달리기를 게을리한 것은 마지막날 몇 시간 동안이었다.

기록 떠나서 뛰는 분위기를 즐긴다

앉아서 일하는 생활과 탈것의 발달은 ‘생존’을 위한 달리기를 ‘유희’와 ‘성찰’의 달리기로 변화시켰다. 인간의 달리기는 여전히 자아를 찾아가는 긴 여정의 한가운데 있다.

마라톤은 달리기의 원형이다. ‘맨발’로 땅을 대할 때 느끼는 쾌감은 달리기의 원초적인 본질이다. 그것은 마라톤의 고유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화된 바퀴’가 그 영역을 대신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적어도 2003년 한국의 봄은 그렇다.

인라인 스케이트 인구가 250만명(인라인 장비 판매량 기준 추산)을 육박하면서 마라톤의 권좌를 넘보고 있는 것이다. 맨발을 통해 전염되는 마라톤이라는 열병은 ‘자기성찰’과 ‘정신건강’이라는 강력한 바이러스를 매개로 전염되기 때문에 일단 한번 옮으면 좀처럼 치유하기 어렵다. 바퀴를 통한 인라인이라는 열병 역시 ‘스피드와 재미’, ‘자기표현’이라는 변형된 신종 바이러스로 무장하고 있어 그 기세가 대단하다. 전염성으로 보자면 둘 모두 내로라 할 만하다.

바야흐로 ‘맨발’과 ‘바퀴’의 대회전이 벌어지고 있다. 달리기의 세대 교체는 과연 이뤄질 것인가. ‘달림이’(‘달리는 사람들’을 이르는 네티즌 용어)들은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4월13일 일요일 오전 5시.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 쌀쌀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운동복 차림의 수십명이 속속 관광버스에 오른다.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전주·군산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다. 낯선 곳에서 네댓 시간을 죽도록 뜀박질하려고 휴일 새벽이슬을 기꺼이 맞는 이들이다. 직원 8명과 함께 참가한다는 서울시 북부수도사업소 박무형(45)씨는 “기록에 신경쓰지 않고 함께 뛰는 분위기를 즐길 뿐”이라며 쑥스러워했다. 버스는 5시30분 군산으로 내달렸다.

오전 6시30분. 반포대교 근처 한강변에서 몸을 풀고 있는 최기후(44·제일은행 무교동 지점장)씨는 4월21일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할 예정이다. “뛰는 시간만큼은 아무도 나에게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시간입니다.” 최씨와 함께 보스턴으로 날아가는 한국인은 142명이나 된다.

오전 8시30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앞 광장은 이날 열릴 환경마라톤 대회에 참여하려는 이들로 가득하다. 정민재(35·한국항공우주산업)씨는 훈련일지를 인터넷 사이트(www.rundiary.co.kr)에 올리면서 한달 동안 몸을 만들어왔다고 했다. “분당에서 사는데 혼자서 왔어요. 한달 동안 몸을 만드느라 술과 담배도 자제했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전국적으로 5개의 마라톤 대회가 동시에 열렸다. 4월 한달에 열렸거나 열릴 마라톤대회가 41개에 이른다.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마라톤 인구는 올해 연인원 110만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건강달리기(조깅) 인구는 400만~500만명으로 추산된다. 요즘 기업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호회는 단연 ‘건달모임’(건강달리기 모임)이다.

인라인 인구 전국 250만명



같은 날 이뤄진 ‘바퀴’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월드인라인컵 마라톤 대회에 6천여명의 인라이너(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가 참가해 세를 과시했다. 경기 개막 2시간 전인 오전 7시부터 잠실운동장은 지방에서 올라온 대형버스로 가득 찼다. 이날 새벽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김용대(32·에어20·30 회원)씨는 “이런 대규모 대회는 처음이라 새벽 잠을 포기하고 올라왔다”며 “인라인으로 도로를 질주하는 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 옆으로 하늘색 유니폼을 맞춰 입은 50∼60대 남성들이 자리를 잡았다. 묵묵히 장비를 챙기는 모습이 젊은이들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고 난 뒤 천천히 몸을 푸는 이들의 얼굴엔 들뜬 표정이 역력하다. 대회 개막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잠실운동장은 온 나라에서 모인 인라이너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오전 9시. 마침내 경주가 시작됐다. 형형색색의 유니폼을 차려입은 참가자와 가족, 친구 등 1만명의 인라이너들은 경쾌한 바퀴 소리에 맞춰 잠실벌을 수놓기 시작했다. ‘바퀴의 바다’가 열리고 있었다.

1998년 한반도 남단에 상륙한 인라인 스케이트는 불과 5년 만에 최고의 생활체육으로 부상하고 있다. 동네 뒷골목에서부터 강 둔치까지 바퀴를 굴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등장하고 있다.

인라인 스케이트는 스키 부츠에 3∼5개의 폴리우레탄 바퀴를 연결한 것으로 스키와 스케이트의 기능을 한 데 모은 것이다. 1800년대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북유럽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와 같은 모습의 인라인 스케이트는 1966년 미국 시카고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 뒤 스케이트 선수들의 여름철 체력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인라인은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선보인 뒤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맨발이든 바퀴든 간에 달리기의 중독성은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목적과 수단이 바뀐다는 데 있다. 애초 수단이었던 달리기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돼버리는 현상이 벌어진다.

달리기의 중독성에는 인체생리학적 배경도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의 윤재량 박사는 “베타엔도르핀, 부신피질자극 호르몬, 카테콜라민 등은 장거리 달리기로 인해 인체 내부에 증가하는 대표적 호르몬들”이라며 “이런 물질들은 안정성, 자기신뢰감, 자기존중심 등 무드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설명한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느낌!



그러나 맨발이 주는 중독성과 바퀴가 주는 중독성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마라톤이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는 쾌감을 통해 명상과 자기성찰의 기회를 준다면, 인라인은 스피드와 재미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행복감을 안겨준다.

마라톤 풀코스(42.195km)를 완주한 한 경험자의 고백은 마라톤이 주는 중독성의 성격을 구체화시켜준다. “30km를 넘어서고 아주 힘들어지면 몸과 마음이 서로 싸우는 단계로 접어듭니다. 몸이 이기면 포기하지만, 마음이 이기면 계속 달릴 수 있죠. 그때부터 나는 나의 몸 밖에 있게 됩니다. 마치 내가 내 몸 앞에서 달리는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듭니다. 마음이 명령하고 몸이 복종하는 것이죠. 이것은 아주 특별하고 아름다운 느낌입니다. 나의 몸에서 분리된 영혼을 경험하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고요.”

마라톤은 고된 노역이나 마찬가지다. 몸 속의 모든 내장기관들은 발작적으로 반응하고, 허파와 심장은 산소를 모세혈관까지 보내주느라 격렬해진다. 바로 이 순간, 머리는 명상을 할 수 있는 평정상태에 놓인다. 운동의 일종인 마라톤에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다소 철학적 수식어구가 잘 어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인라인의 중독 포인트는 재미와 스피드, 창조성에 있다. 정신과 의사인 장용순(41) 박사는 “스케이팅 기술이 좋으면 다양한 주법으로 창조적인 주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마라톤에 비해 엄청난 스릴을 즐길 수 있는 동시에 바퀴가 미끄러지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의 경치를 감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한롤러경기연맹 박순백(50·드림위즈 부사장) 이사는 인라인 스케이트에 대해 “달리고 싶은 욕망과 즐기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채워주는 스포츠”라며 “마라톤이나 스케이트가 2차원적이라면 바퀴를 사용하는 인라인은 3차원적인 스포츠”라고 설명한다. 마라톤에 버금가는 ‘달리기 효과’가 있으면서도 마라톤이 보여주는 답답함과 단조로움에서는 한발 비껴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라인은 단순히 달리기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기술로 각종 묘기(어그레시브)를 부릴 수 있다.

달리기 열병이 마냥 긍정적 효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너도나도 마라톤 대회를 유치하느라 마라톤 대회가 포화상태에 이르고, 이는 또 대회의 부실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맨발’과 인라인 스케이트, 자전거가 섞여 있는 주말 도로와 광장들은 안전사고의 위험성도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스팔트 위에서 만난 ‘달림이’들은 하나같이 맨발이든 바퀴든 당장 도로로 달려나오라고 손짓했다. ‘행복한 중독’을 만나보라면서.




글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 만만하게 보면 큰코 다친다
  • 풀코스의 꿈은 천천히 꾸자






  •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