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3년02월20일 제447호 

“처벌하고 싶냐”고 묻지 말라

초동수사 부실한 가정폭력 사건… 피해자가 원치 않아도 법에 따라 처리하는 풍토 돼야


사진/ 이경실씨 사건을 보도한 스포츠 신문들에서는 사건의 본질인 ‘폭력사건’이 온데간데없어졌다.

2월9일 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인기 개그우먼 이경실씨가 사는 아파트 앞에 경찰이 출동했을 때, 이씨는 이미 119 구급차에 실려 있는 상태였다. 경찰신고는 이씨가 한 것이 아니라 119 접수와 함께 자동으로 이뤄졌다. 경찰의 진술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경찰 : 무슨 일입니까?

이경실 : 남편에게 맞았어요.

경찰 : (응급차 옆에 서 있는 손씨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남편 맞습니까”

이경실 : (고개만 끄덕)

경찰 : (손씨에게) 이 사람이 아내 맞습니까?

손광기 : 예.

경찰 : 아내를 때렸습니까?

손광기 : 예.

경찰 : (이씨에게) 형사처벌을 원합니까?

이경실 : 지금은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일단 병원에 가야겠어요.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가해자와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악몽

경찰은 이씨가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남편의 형사처벌을 결정하기 전에 여러 가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이씨의 피해자 진술을 받지 않고 현장을 떠났다. 이 사건이 알려질 경우 이씨의 연예활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씨는 변호사와 상의한 뒤 남편의 형사처벌을 원한다며 피해자 진술의사를 밝혀왔다. 경찰은 사건 발생 사흘 만에 손씨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여성계는 이 사건이 남편의 아내폭력 사건에 대한 경찰의 초동수사가 얼마나 부실하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씨처럼 변호사를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여성들은 가해자와 다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악몽 같은 현실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것이다.

서울여성의전화 박연숙 사무국장은 “검찰 수사지침이나 경찰 교육내용에는 상습적이거나 폭력의 정도가 심하고, 흉기를 사용했을 경우 즉각 현장연행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격리·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경실씨 사건의 경우 경찰은 흉기 사용이나 상습적인지 여부 등의 기초조사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초동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사건이 은폐되고 축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일선 파출소 직원들의 가정폭력사건에 대한 비전문성과 불성실한 태도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괜히 나섰다가 나중에 남의 가정을 깼다고 항의하면 누가 책임지느냐”고 항변한다. 손씨를 조사한 용산경찰서 황운하 형사과장은 “가해 남편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정 해체나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다시 말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형사처벌을 강행하는 것은 가정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아내폭력 문제를 다루는 가정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일명 가정폭력방지법)이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반대하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죄)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이 법 제9조 ‘가정보호사건의 처리’에는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경찰은 또 이 법의 제정 목적이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서울여성의전화가 2001년 펴낸 통계자료를 보면, 가정폭력 피해여성의 경찰신고율은 12%인데, 이 가운데 36.2%가 “경찰이 집안일이니 잘 해결하라며 돌아갔다”고 응답했다. 신고하지 못하는 이유도 “경찰이 와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다”는 응답이 13%나 됐다. 현혜순 한국여성상담센터 소장은 “아내폭력은 그것이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다.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반적으로는 폭력행위가 처벌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 내에서는 그런 폭력이 용인된 것이 지금까지 사회 분위기다. 피해자의 처벌의사와 관계 없이 법에 따라 처리하는 원칙이 바로 서면 아내폭력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정의 유지’와 ‘폭력의 근절’사이

경찰이 ‘가정의 유지’를 중시하는 반면, 여성계는 ‘폭력의 근절’에 방점을 찍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유지를 먼저 고려하는 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아내폭력을 근절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가족 이데올로기가 유난히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아내폭력을, 사람이 사람을 때린 폭력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아내폭력을 가정 내 문제로 치부하거나 ‘여자가 맞을 짓을 했겠지’ 하는 식의 사고방식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전통적 인식은 이경실씨 사건을 보도한 황색언론의 보도태도에도 잘 나타난다. 2월11일 구속영장이 청구된 손씨는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불륜이 있었는지 이혼을 할 것인지 여부 등 사생활 침해성 기사들을 양산하던 스포츠신문들은 손씨의 ‘눈물회견’을 대서특필했다. 방송오락 프로그램도 이씨를 ‘불쌍한 여자’로 몰고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정작 사건의 본질인 폭력문제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여성계는 흉기를 사용하는 등 질이 나쁜 사건의 경우에도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심각한 의처증 등 병원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처분을 하지 않는다. 현실이 법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법원의 처분 가운데 보호시설감호위탁이라는 것이 있는데, 가정폭력사범을 감호위탁할 감호소가 한 군데도 없는 탓에 이런 판결은 내려진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 허점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법과 수사지침이라도 제대로 해석하고 집행해 아내폭력을 뿌리뽑겠다는 수사기관과 사회 전체의 의지라고 여성계는 강조한다.

“피해여성이 매맞는 아내(맞을 짓을 했을 아내)라는 주홍글씨처럼 불리다가, 법적·행정적·사회적으로 ‘피해자’로 명명된 지는 얼마 안 됐다. 1983년부터 줄기차게 노력해왔지만 거의 15년이 지난 1998년에야 가정폭력방지법이 마련됐다. 아내와 북어는 패야 말을 듣는다는 식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서 남편은 아내를 때려도 된다는 집단 무의식은 뿌리가 깊다. 이런 분위기에서 폭력에 희생당한 여자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남편폭력을 뿌리뽑는 것은 당장의 피해를 없애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왜곡된 집단 의식을 뿌리뽑는 일이다.”(황경숙 서울여성의전화 회장)

이재성 기자 firib@hani.co.kr/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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