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 등록 2002.02.27(수) 제39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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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돈을 향해 튀어라! “부자 되세요”에 드러나는 당당한 부자의 꿈… 2002 한국인들의 노골적인 욕망 읽기
잘생긴 정우성이 세미정장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그는 “능력 있고” “깜짝 선물로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남편이다. 인간적이며 매력적이다. 삼성카드가 내보내기 시작한 이 광고는 대한민국 젊은 ‘부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가를 즐기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신흥부자들. 이들의 이미지는 당당하고 떳떳하다. 이런 이미지는 광고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이미 널리 자리잡고 있었다. 올 초 비씨카드사에서 내보낸 “여러분, 부∼자 되세요” 광고멘트가 폭발적인 유행어가 된 배경에는 이렇듯 대중성을 획득한 ‘부자의 꿈’이 있다.
아등바등 살지 않기 위하여…
(주)하늘사랑이 운영하는 채팅사이트 스카이러브(www.skylove.com)가 지난 1월8∼13일 회원 1557명을 상대로 ‘돈에 대한 가치관’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0% 이상이 돈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58%,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응답은 33%였다. 돈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응답자는 9%에 불과했다. ‘부’에 대한 열망은 기존의 여러 가치관을 앞지르기까지 한다. 삼성증권이 지난 1월23일∼2월1일 홈페이지 회원을 상대로 ‘올해 가장 얻고 싶은 것’을 설문조사했을 때 참가자(1786명)의 71%는 ‘부’를 꼽았다. 건강, 사랑, 명예 등은 각각 한자리수에 머물렀다.
아등바등 살지 않기 위하여…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부’를 꼽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돈이 충분해야 세상을 아등바등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내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을 갖고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길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왜 남의 집 아이처럼 공부 못하냐고 꾸중한다. 만약 아이들이 ‘왜 우리 부모는 다른 부모처럼 돈을 못 버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아등바등 살기 싫다”가 피곤한 현실을 반영한다면, “돈 못 버는 사람은 실패자다”는 경쟁적인 의식을 대변한다. 이러한 세태를 타고 일약 유행어로 떠오른 “부자 되세요” 광고멘트는 설 연휴 덕담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각종 인터넷카드, 홍보성 이메일에서 “쥔님, 부자 되세요”, “여러분, 돈 많∼이 따세요”, “그∼지되면 안 돼요. 꼭이요”라는 패러디 문구들이 넘쳐나며 캐릭터 디자이너들의 손길도 바빠졌다. 설 연휴 기간, 스카이러브가 제공하는 휴대폰 배경화면의 이용도를 보면 상위 10개 중 7개, 문자메시지의 경우 8개 중 6개가 ‘부자’ 관련 내용으로 채워졌다.
“돈에 대해 자기 기준을 가지려 한다”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2월23일 강원도 동해시에서 연 ‘정월대보름맞이 흙나누기 시민화합대회’에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시민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각 동에서 가장 좋은 흙을 채취해 합토의식을 가진 뒤 꽃씨와 함께 나눠주는 이 흙나누기 행사는 ‘동해시 부자 기원설’을 밑바탕으로 기획한 것. 이 지역에서는 정월대보름날 밤 부잣집 논밭 3곳 이상의 흙을 갖고 와 자기네 논밭에 넣으면 그해 농사가 잘돼 만석꾼이 된다는 설화가 구전돼 오고 있다. 현대판 큰 복의 상징어인 ‘부자’가 지자체 행사에 직접적으로 내걸렸다고 해서 의아해하는 시민은 없다. 돈을 향해 달리는 한국인의 풍경은 최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가맹점을 넓혀가고 있는 복권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복권방은 돈을 향한 한국인의 심리가 가장 ‘한국적으로’ 제도화된 공간이다. 서울 미아동의 복권방 ‘대박찬스’의 김은희 사장은 “많으면 5만∼6만원, 적게는 1만원 정도씩 투자하는데 긁는 복권은 대중이 없고 추첨식 복권은 가장 발표날이 가까운 것 위주로 찾는다”며 “30∼40대 샐러리맨들과 30대 주부들이 주이용자이고 대부분 당첨이 안 돼도 미련없이 돌아선다”고 말한다. 이들은 부자가 되길 원하지만 부자가 될 수 없고 대박을 꿈꾸지만 대박을 터뜨리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다. 그렇다고 2002년에 부는 ‘부자의 꿈’을 일시적인 이상열기라고 여길 수 있을까? 대중의 심리는 출판계 흐름을 통해 알 수 있다. 2000년 6월 1권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권이 나온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황금가지)는 부자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을 바꿔주는 내용이다. 1년 반 동안 꾸준히 팔려 195만부의 판매고를 올렸다. 출판사쪽에서는 “한마디로 시대가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황금가지 권선희 과장은 “80∼90년대에 책이 나왔다면 욕만 하고 누구도 관심을 안 가졌을 것이다. 아이엠에프를 겪으면서 돈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젠 가난해도 마음이 행복하면 된다고 위안하는 것은 옛말이다. 너나없이 눈치만 보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부자’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 같다”고 말한다. 교보문고 위성계 홍보팀장은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심리가 확산되면서 부자에 대한 마인드와 돈에 대한 개념, 협상의 원칙을 설명하는 책들은 손때를 타지만, 단돈 얼마로 몇배를 벌 수 있다는 식의 반짝 가이드성 책들은 큰 인기를 끌지 못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돈에 대해 자기 기준을 가지려 한다”는 설명이다.
직장인 유혹하는 다단계판매
‘부자의 꿈’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도 점차 바꾸고 있다. 직업과 인간관계가 재편되는 것이다. 인터넷 법률사이트 오세오닷컴(www.oseo.com)의 최용석 대표(변호사)는 96년 검사직을 그만두고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두해 동안 변호사로 번 돈을 종잣돈 삼아 이번에는 법률벤처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비교적 요직으로만 돌던 그가 검사직을 그만둔 이유는 “남의 눈치 안 보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세 가지 단계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첫째, 남 신경 안 쓰고 생존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둘째,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욕을 채워준다. 셋째, 쓰기에 따라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가 생각하는 부자의 자산 규모와 돈 관리 방법은 어떨까. “자산규모는 30억원 정도? 그 정도면 별장 갖고 요트 탈 수준은 안 되지만 한번씩 해외 휴양지로 훌쩍 떠나고 사람들 만나 밥사고 술살 때 아쉽지 않을 것이다. 몇 억원은 느긋하게 주식에 투자해놓고, 은행 이자에 매이지 않고 오피스텔 3채 정도 사서 월세를 받는 게 일반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최 변호사처럼 과감한 전직이나 창업은 고전적인 계열에 속한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는 ‘투잡스(two jobs)족’들이 늘고 있다. 직장인 포털사이트 샐러리맨(www.sman.co.kr)의 조사에 따르면, 열에 아홉 이상이 “기회만 된다면 부업하고 싶다”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업에 대해 긍정적인 이유로 경제적 여력을 든 사람이 81%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유혹을 느끼는 것은 다단계판매. 실제 이 조사에 응한 직장인 10명에 7명은 “다단계판매 가입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경기도 안양시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김아무개(32)씨는 교사생활 시작과 동시에 대표적인 다단계판매 회사인 한국암웨이 회원으로 활동해온 전형적인 ‘투잡스족’이다. 그의 이중 직업생활은 벌써 7년째, 부업 벌이는 어느덧 본업의 3배를 훌쩍 넘는다. 그 결과 인간관계도 돈벌이에 따라 재편됐다. 그는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암웨이 회원으로 가입할 사람, 암웨이 물건만 살 사람, 둘 다 하지 않을 사람. 이 분류에 따라 투자하는 시간과 에너지도 달라진다. “회원들끼리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고, 부부동반으로 조를 꾸린다. 회원들끼리는 돈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공통점이 있고, 회사를 통해 여행 등 각종 베니핏(이익)을 누리므로 더이상의 밀착된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없다.” 거꾸로 김씨와 같은 이들을 동료나 친구로 둔 사람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인 강아무개(42)씨는 “얼마 전 친하게 지냈던 대학 후배가 오랜만에 집에 놀러오라고 해서 아내와 함께 갔더니 다단계판매 설명회를 하려 했다. 아주 언짢았고 무엇보다 서글펐다. 알고보니 그 후배는 그 일을 시작한 이래 친목모임에는 전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아무런 소득이 없는 관계라 여기는 듯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도 그와 예전처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게 됐다.”
돈에 대한 태도가 관계를 바꾼다
돈을 굴릴 줄 아느냐, 굴릴 줄 모르느냐에 따라서도 관계가 바뀐다. 주식투자나 부동산투자를 하는 사람과 꼬박꼬박 적금 붓고 허리띠 졸라 매는 사람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이 흐른다. 돈에 대한 태도에 따라 화제와 정보가 크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의 한 여자고등학교 동창회 사이트에서는 잠깐 동안 ‘돈논쟁’이 붙기도 했다. 한 친구가 “니들도, 부자 되거라”라는 메시지를 게시판에 올린 게 발단이 됐다. 처음에는 우려와 질시, 이해와 옹호가 넘나드는 정도였으나, 점차 논쟁은 교육관, 세계관으로까지 확대됐다. 이 학교 출신 김민정(35·주부)씨는 “간단한 인사말이 ‘자식들 조기유학 보내는 애들은 입닥쳐!’라는 거친 험담까지 나올 정도로 비화됐다. 돈이 있건 없건 저마다 돈에 매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씁쓰레한다. ‘부자 되기’ 심리는 벤처거품기에 사회를 풍미한 ‘대박 터뜨리기’ 심리와도 모호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박 심리가 무모한 도전이었다면 부자 심리는 치밀한 계산과 발빠른 투자를 밑천으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식으로 대박이 터지거나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 부자가 된 사람이 있더라도 그 밑에는 패가망신한 수많은 개미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부자 되기 지침서의 첫 번째 대목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다만 대박의 꿈이 확실한 실패율을 드러낸다면, 부자의 꿈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양한 길을 거쳐 자기 몸에 맞는 속도로 다가갈 수 있는 ‘가깝고도 먼’ 꿈이다. ‘부자’는 80년대 이래 한국 경제를 역동적으로 이끌어온 ‘중산층’의 21세기형 버전이기도 하고, 구제금융기의 쓴맛을 본 서민들에게 생존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벤처로 대박을 터뜨린 소수의 사람들을 향한 부러움이자, 밤낮없는 노동에 대한 지겨움이기도 하다. 2002년 대한민국에 몰아치는 ‘부자의 꿈’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속에 ‘오늘과는 다른 내일’의 ‘인간다운 삶’을 기대하는 소시민의 솔직하고 노골적인 열망의 표현일 것이다. 수직 사다리에서는 꼭대기까지 오르지 않는 다음에야 항상 누군가의 밑에 있게 된다. 부자에 대한 자기 나름의 모델 없이 몰가치적으로 꾸는 ‘부자의 꿈’은 미래를 위해 현실을 버리는 일이 아닐까? 혹은 잠깐의 행복과 위안을 위해 맛보는 달콤한 사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치면 건강을 위협하는.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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