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논단

김대중 정권 유감

박석운/ 노동정책연구소장

눈뜨고 목베어가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옛날 어른들이 험한 세태를 일 러 눈뜨고 코베어가는 세상이라고 표현해왔는데 이제 본격적인 막가파식 험한 세상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12월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미국 재무차관 등과 면담하는 자 리에서 IMF체제 아래서 기업을 살리려면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고 합의했 다.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정리해고 요건을 엄격화하고, 정년을 직종에 따 라 상향조정하겠다고 내세웠던 그였기에, 또 정부수립 50년 만에 처음으 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한 당선기자회견에서 새 정부는 실업문제 해결 에 최대 역점을 두고 적극 나서겠다고 약속한 지 3∼4일 만의 일이었기에 더욱 충격적이다.


재벌과 경제관료가 더 큰소리친다

아무리 IMF를 실제 배후조종하고 있는 미국쪽 요구라 할지라도 대통령 당 선증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당선 기자회견 목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차의 약속을 일거에 내팽개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더 욱이 지난 겨울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에 항의해 일어난 총파업 결과 정리해고는 2년간 유예되고 특히 기업인수 합병시 정리해고 조항이 삭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실업 등 고용불안은 가정불안으로 연결되고, 가정불안은 사회불안으로 이 어져서 이를 치유하는 데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소요되고 국민생활안정 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이므로 당사자와의 신중하고 끈질긴 논의 조정 과정과 합의과정이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지 않은 것 때문에 국가부도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날의 경제파탄은 재벌의 중복과잉투자와 이를 사실상 조장 방관해온 경제관료들의 정책실패 때문에 초래된 것임은 공지의 사실이다. 부패한 정치권과의 정경유착으로 금융기관의 돈을 독점하다시피한 재벌들의 부실 경영이 은행을 망하게 하고, 나라경제까지 망하게 한 것도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인 재벌경제체제, 정경유착, 부패구조 의 청산을 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관치금융의 본산이고 이 경제난국의 주요책임부처인 재정경제원을 해체하 고 관련 경제관료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물론, 돈세탁방지법, 부패방지법 제정과 이를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금융실명제와 금융종합과세 강화 를 통해서 정경유착과 부패구조의 고리를 끊는 한편, 재벌기업의 문어발 식 경영, 차입경영, 족벌경영의 폐해를 척결하기 위한 경제민주화와 경영 민주화를 위한 과감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특히 경제난국의 주요원인인 재벌총수의 경영독재를 해소시키는 것이 무 엇보다 시급하다.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해야 할 정도로 기업경영이 위기에 처해 있다면 경영전권을 휘두르며 그런 위기를 초래한 부실경영책임이 있 는 재벌총수부터 책임지고 퇴진해야 마땅하다. 또 변칙상속 등의 편법으 로 대물림하는 재벌세습체제를 청산하고 철저한 전문경영체제의 구축과 종업원들의 경영참가를 제도화해야 한다.

나라경제가 결딴났는데도 재벌과 경제관료들은 경제파탄에 책임지는 자세 를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경제위기를 그들만의 오랜 숙원사업 해결의 기회 로 삼아 금융실명제의 폐지를 요구하고, 정리해고와 파견근로제의 도입을 획책하는 한편, 심지어는 근로기준법의 폐지까지 주장한 것은 실로 놀라 운 일이다.


구여당과 신 여당의 새로운 조화?

그런데 새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뒤 도리어 금융실명제가 사실상 허물어 지고, 정리해고가 도입되는 것은 단순히 IMF 경제신탁통치 때문일까? 이 제 입법기관인 국회에는 진작부터 정리해고 조기도입에 찬성하던 구여당( 한나라당)과 종전에는 반대였으나 새로 찬성하게 된 신 여당(국민회의 자 민련)만이 원내교섭단체로 포진하게 되는 셈이다. 그나마 허술하지만 시 늉이라도 하던 야당이라는 작은 방파제마저 이제 없어지고 만 것이다.

우리 경제 상황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 와중에서 노동자들의 고용상황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빠지고 있다. 이른바 고용대란 시대, 총체적 고 용불안 시대의 고용안정문제는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 의 안정이나 삶의 질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거센 IMF풍랑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저 무수한 노동자들의 목을, 그리고 저 무수한 가정의 평화를 지켜줄 든든한 방파제 구축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당사자인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이 사회를 사람사는 세상, 함께사는 세상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각계각층의 양심세력이 모두 함께 힘 을 합쳐야 한다. 그리하여 원초적 생존권이자 가장 중요한 인권인 일자리 를 지킬 권리를 수호하는 일에 지혜를 모아 우리 모두 함께 나서야 한다.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8일 제 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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