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

만화가 박재동

한때, 그는 손바닥만한 만평 하나로 국민의 하루를 열었다.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아침 신문을 든 사람들이 화투 패를 까듯 슬쩍 첫 장을 젖히면 나타나는 ‘한겨레 그림판’은 그날의 한국 상황을 웃음 한방으로 날려버렸다. 9㎝×9㎝ 네모칸에 실려 배달된 그의 만평은 화장실에선 쾌 변을 밀어주고, 출근길엔 동료와의 말길을 터줬다.

어느날인가 졸지에 그 그림판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사람들은 새삼 그의 이름을 아쉬워했다. 박재동(45). 88년 5월15일부터 96년 5월30일까지, 꼬 박 8년 보름을 독자들의 가슴으로 날아오던 그의 분신같던 만평은 이제 한칸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긴 호흡으로 움직이는 장편만화영화의 세계로 변신하는 참이다.


“정권교체, 제2의 광복같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주)오돌또기 사무실(02-592-6443)이 시사만화가 박 재동이 애니메이션 제작자 박재동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둥지다. 대통령 선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연말, 그의 일성은 역시 만평자답게 딱 한 마디 “제2의 광복같아”였다.

“곧 정권교체가 되리란 믿음엔 흔들림이 없었지만,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어 조마조마했지. 한달음에 다 바뀌진 않겠지만 문화에 대한 억압이나 탄압이 슬슬 풀려나가지 않을까. 문화쪽 사람들이 숨통 터놓고 신바람나 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박씨는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인권영화제를 열었던 서준식씨가 제주 4·3을 소재로 한 기록영화 <레드 헌트>를 상영했다는 까닭으로 구속됐던 것이다. 그가 “이제까지 살아온 내 삶 모두를 털어넣 고” 있는 장편 애니메이션 <오돌또기>가 바로 제주 4·3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니 그 공안 한파가 자신들의 작업에까지 밀려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말리는 분위기였어. 장사가 되겠느냐, 어디 협찬 사가 붙겠느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던 곳까지 등을 돌리니까 와, 정말 우리 사회가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이렇게까지 경직돼 있나 하고 슬퍼지더 군.”

그가 힘을 얻은 건 김대중 당선자가 지역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와 한 약 속이다. “4·3사건에 대한 해법은 진상규명을 대전제로 억울하게 희생된 넋을 위로하는 쪽으로 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오돌또기> 팀이 하고 있 는 일과 맥이 통한다.

박재동과 4·3의 만남은 70년대 초, 그의 대학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52 년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 만화가겟집 아들로 서울에 유학을 온 박재동씨 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 동기이자 자취방을 나눠쓰던 화가 강요배씨에게서 처음 4·3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제주가 고향인 요배에게서 한 날 제사지내는 집안이 여럿일 만큼 그 땅 에 한의 역사가 배어있다는 걸 들은거라. 벌써 20여년 전 얘기인데도 아 직 그 목소리가 생생할 만큼 내겐 충격이었어요. 신문사에 들어오고 난 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면에 가끔 그걸 그리는 것 외엔 없었지. ”

박씨 인생에 전환점이 온 건 강요배씨가 제주민중항쟁사를 주제로 내건 전시회를 연 92년, 그의 나의 마흔이었을 때였다. 옛 친구의 전시회장에 서 그는 4·3을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을 느꼈다. 마 침 제주 사람이 하던 영화사에서 차라리 전 국민이 볼 수 있는 극장용 장 편 애니메이션으로 하자는 제의까지 들어왔다.

(사진/'오돌또기' 시놉시스를 펼쳐든 박재동씨. 2천5백여명 뜻있는 이들의 후원이 자칫 조급해지려는 그의 마음을 다잡아 준다. )

“갑자기 내 몸이 붕 뜨더라구. 언젠가 해야지 하고 벼르기만 하던 만화 영화에 대한 꿈이 현실로 다가온거야. 바람이 들었지. 낮에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으면 미치겠고, 밤에 집에 오면 잠이 안 오고. 그래서 위원장( 편집국장)한테 나 그만둬야겠다고 말해버렸지.”

박재동의 그림판이 없는 <한겨레>를 어찌 상상할 수 있느냐고 막무가내로 말리는 편집국 분위기에 밀려 3년을 더 버텼다.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을 하다가 처음 시사만화가로 뛰어들 때의 각오가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화가로서 전시장에서 이뤄지는 미술행위에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어요. 80년대 민중미술을 기치로 내걸었던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도 뛰어봤 지만 그 자괴심은 풀 길이 없었지. 한정된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림말고 매일 전 국민에게 그림 한점씩을 보여주자, 역사의 수 레바퀴 한가운데 들어가 민중들과 그림으로 소통하자, 그런 포부였지. 동 양화니 서양화니 구분짓는 건 워낙 싫어했고, 만화야 어릴 때부터 다락방 에서 매일 그리던 거니까 <한겨레> 그림판이야말로 내겐 안성맞춤인 캔버 스였던 셈입니다.”

“나같이 행복한 시사만화가는 온 세계를 뒤져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할 만큼 그는 ‘그릴 수 있는’ 한껏의 자유를 누렸다. ‘상식과 양심’에만 어긋나지 않으면 누구도 그의 그림판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시사 만화가 누구에게나 공평한 고통이 그를 비켜간 것은 아니었다. 분초를 다 투는 마감시간과의 전쟁, 반응이 총알처럼 튀어오는 독자와의 전쟁, 다른 신문 만평과의 전쟁, 재미없으면 어쩌나 하는 ‘썰렁함’과의 전쟁… 너 무 힘들어 한번 손을 떼면 신문사쪽으론 오줌도 누기 싫다는 그 시사만화 가의 고통을 버리고 그는 애니메이션의 황홀한 나라로 날아갔다.


만평 생각에 가끔 몸이 근질근질

“막상 그만두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구. 전쟁터에서 농사짓는 집으로 돌 아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금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가끔 만평을 그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할 때가 있어요. 가을 날, 좋은 풍경 보면 그 림 그리고 싶은 것과 같은 이치지. 장르가 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거기다 뭘 담는냐, 누구와 그걸 나누느냐가 문제겠지.”

애니메이션은 회화에 대한 갈증과 만화에 대한 꿈, 거기다 음악과 움직임 에 대한 표현 욕구까지, 모든 걸 충족시켜주기에 지금으로선 세상에 대해 발언하고 싶은 그에게 최상의 무기다.

“<오돌또기>를 만드는 데는 한 12억쯤 들어요. 영화제작사는 일찌감치 손을 들었지. 서울무비에서 일하던 오성윤 PD하고 나하고 꼭 비바람 몰아 치는 광야에 선 꼴이라 같이 일하는 후배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그래도 텔레비전 연작물 <아구찜과 빠가사리> 등 이런저런 비디오작업을 같이 해나가면서 (주)오돌또기의 꿈을 키워가고 있고, 돌산을 고르는 이 런 심정이 결국 미래의 우리 애니메이션 작품에 주춧돌이 되리라고 믿습 니다.”

10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오돌또기>를 만들겠다는 그의 결심은 다부 졌다. 1년여 넘게 고치고 다듬고 있는 시나리오 작업이 그 한 증거다. 만 화검열철폐를 위한 시위며, ‘우리만화발전연구회’의 회장 일 등 대 사 회활동이 그를 또한 바쁘게 하지만, 틈 날 때마다 제주 조천면 선흘에 있 는 제2작업실에 내려가 구상을 가다듬는다. 96년 11월에 열었던 ‘<오돌 또기> 작품 설명회 및 제작비 기금 마련을 위한 특별전시회’에 쏟아졌던 2천5백여명 뜻있는 이들의 후원의 손길이 자칫 조급해지려는 그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든든한 뒷심이다.

“98년이 제주민중항쟁 50돌이 되는 해입니다. 억새무덤이 들려주는 그 피울음의 세월을 넘어 한라산에도 봄은 오고야 말겁니다.”

사진 이종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8일 제 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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