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새해기획

호랑이 없이는 한민족도 없다

(사진/민화뿐만 아니라 풍수사상, 부적 등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호랑이는 한국인 정서의 일부분으로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

김호근/ 민학회원·서울예전 강사

어떤 나라의 상징이나 문장을 통해 특정 동식물에 대한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문화에서의 친숙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국화나 국수(國獸)도 마찬 가지다. 이들은 대개 그 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식물이나 동물이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국수로 지정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사람들에게 이런 대상임에 틀림없다. 호랑이는 한국인에게 뿌리깊은 정서의 일부다. 이는 무엇보다 실제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았던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 다.


사람과 같이 생각하며 행동하는 경배 대상

한국의 지형은 호랑이 생태에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 같다. 호랑이 출몰과 호환의 옛 기록들은 흔하다. 삼국시대 이래 도성 안에 나타난 범에 대한 기록은 <증보문헌비고>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법전인 경국대전 에는 호랑이를 잡는 특수부대 ‘착호갑사’(捉虎甲士) 4백40명에 대한 채 용규정과 포상기준까지 명시돼 있다. 당시 호환을 막는 일은 지방관서의 주요 업무의 하나였다. 고려시대의 한산군(지금의 서울)에서는 원님이 세 차례나 호랑이에게 물려갔으며, 범의 생식기인 겨울에는 왕이 잠을 잘 이 룰 수가 없었다는 야사도 전한다.

사람 쉰명이 모여야 꽹과리를 쳐서 호랑이를 쫓으며 고개를 넘을 수 있다 는 데서 나온 ‘쉬너미고개’, 백명이 모여야 그렇게 넘을 수가 있다는 데서 나온 ‘배우개(백고개-지금의 서울 종로4가)’와 같은 지명이 전국 도처에 남아 있다. 또 서울에서 호랑이를 쫓은 강감찬 장군의 이야기는 흔히 듣는 옛날이야기의 하나다.

1996년에 산림청은 “남한에 호랑이는 없다”고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 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공식 확인해주었지만, 호랑이와 관련된 화제는 1995년 10월 강원도 태백산에서의 호랑이 발자국 소동을 포함해 최근까지 끊이지 않았다. 아직도 촌로들은 깊은 산에 ‘큰 짐승( 호랑이라 직접 부르는 것을 금기시해 부르는 명칭)’이 있다는 것을 조금 도 의심치 않는다.

호랑이 곶감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사람은 없으리라. 지금 나이 든 세대들 은 사람과 같이 생각하며 행동하는 호랑이가 주인공이 되는 옛날 이야기 를 흔히 듣고 자랐다. 호랑이 이야기 중에는 호랑이가 의인을 알아보고, 효성에 감동하고, 사람을 돕는 이야기에서부터 인간으로 둔갑하는 기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유머러스한 호랑이 이야기가 가장 많다 는 점이 우리 호랑이 이야기의 특성을 이룬다. 호랑이가 있는 어느 나라 든 이런저런 기담·괴담이 있긴 하지만 필자가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해본 바로는 우리 호랑이 이야기의 특성은 유별난 것이다.

호랑이를 두려워해 산신으로까지 존숭하는 가운데 호랑이를 인용한 많은 속담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호랑이를 우스개 주인공으로 의인화한 이야 기를 다양하게 만들어낸 것은 한국인의 호랑이에 대한 심기(心機)의 일전 (一轉)인 동시에 한국인의 유머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랑이 이야기가 많고 듣기도 좋아하는 조선을 ‘호담국’(虎談國)이라고 육당 최남선은 이름했다. 범이야기 하나만으로 <아라비안나이트> <태평광기> <데카메론> 같은 책을 꾸밀 나라는 조선밖에 없으리라고도 썼다.

민화의 호랑이 그림도 호랑이를 유머러스하고 바보 같이 그려놓음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희한한 미술의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사람에게 뿌리 깊은 풍수사상의 좌청룡우백호에 대한 생각은 새해에 문의 좌우에 용호( 龍虎)를 쓰거나 그려붙이는 세화(歲畵), 문배화로 일상화됐다. 호랑이 그 림은 벽사진경의 뜻을 나타내게 되었고 실제 호랑이의 무서운 위력이 그 런 역할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호축삼재’(虎畜三災)라 쓴 부적의 호랑이 그림이 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민화로 꼽는 까치호랑이 그림을 포함해 넓게는 여러가지 민화 전체가 ‘부적화’(符籍畵) 성격이었다.


사라지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우화

필자가 엮은 <한국호랑이>를 본 한 중국기자가 “한국에는 호랑이 문화가 있다. 중국에는 없는 것이다”라고 한 일이 있는데, 호랑이가 있던 동남 아시아 여러나라 중에서는 그 양이나 특이성으로 볼 때 가장 독특한 한국 문화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자연에 호랑이가 있어 자연에 대해 더 근엄하 게 생각하고 행동을 삼갔던 것이다.

호랑이가 있던 때에 자연에 대한 여러가지 상상은 더 실감 났고 생각은 풍요로웠다. 지금은 자연파괴에 따라 실제의 호랑이도 서식지를 잃어가고 , 먹이사슬의 균형을 잃은 데다 사람들의 포살과 동족교배에 따라 자연도 태를 내다보게 되었다. 야생의 호랑이는 차차 볼 수 없게 되고 우리 안에 갇힌 과거의 위대한 이 영물은 용처럼 상상의 동물로나 기억될지 모른다. 호랑이가 산과 자연에 버티고 있는 가운데 그를 두고 하던 이런저런 우스 개는 과연 호랑이 담배먹던 때의 이야기가 되었다.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8일 제 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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