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원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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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에 없이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는 베이징에서 한국 사람들만은 유난히 추운 겨울을 맞고 있다. 한국에 몰아닥친 IMF의 한파가 숨돌릴 틈도 없이 베이징 한인사회를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장기 거주하는 한국인의 규모는 수교 원년인 92년 1800명에서 9 6년 말 이미 2만여명 수준으로 커졌다. 짧은 기간 동안 사람들이 열배 이 상 많아진 것이다.
그 사이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우다코우에는 속칭 “한국 거리”로 불리는 신흥 상권이 형성됐고, 한국기업들의 진출이 러시를 이루면서 주 말이면 베이징 교외의 골프장들이 온통 한국인 상사원들로 가득 차곤 했 다. 한마디로 그동안 한국인들은 채플린의 영화 <황금광 시대>의 채금꾼 들처럼 떠들썩하게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주름잡았다.
그러나 이처럼 급격하게 달구어진 한인사회의 열기는 IMF시대를 맞아 이 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예년 같으면 각종 모임과 망년회로 흥청망청 했을 연말에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우울하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환송회’가 모임의 주종을 이뤘다는 점이다.
각 기업이 중국에서 벌인 사업을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이면서 주재원들을 대거 국내로 불러들이는 바람에 갑작스레 돌아가게 된 사람들을 보내는 자리가 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떠나는 사람은 한국에 돌아간 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하고, 남은 사람은 닥쳐올 내핍을 견딜 것을 고민한다.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우울한 환송회다.
하지만 이들보다 오히려 딱한 경우는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유학생들이다 . 5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베이징의 유학생들 가운데 단기연수생들 은 대부분 일정을 앞당겨 귀국하고 있고, 석박사 과정 중에 있는 학생들 도 짐을 싸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중도 유학 포기 사태가 대량화될 조짐마저 보인다.
우울한 가운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베이징의 한 레스토랑에서 자선연주회 와 미술전시회 등을 열어 짐을 싸는 유학생들을 돕기 위한 장학기금을 마 련하는 행사가 열려 한가닥 희망의 씨앗을 보여줬다. 중도유학포기는 미 래의 한국에서 희망을 빼앗는 것이라는 교민들의 생각이 모인 결과였다. 장소는 레스토랑 ‘파인 힐’(대표 구자경). 이 레스토랑은 97년 12월21 일부터 올해 1월3일까지 2주간 88년 서울올림픽 장애인 탁구 은메달리스 트인 엄태형씨의 리코더 연주(25년 경력) 등 다양한 행사로 10만위엔(우 리돈 2천만원)의 장학 기금을 모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행사 뒤 모인 기금은 주중한국대사관과 한국상회 등의 선발을 거쳐 20명의 유학생들에 게 장학금으로 지급된다.
작은 레스토랑에서 벌인 행사에서 모인 크지 않은 액수의 돈이 유학생들 에게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보탬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파인 힐’에서 만난 김민수(30·쌍용)씨는 “힘든 때일수록 서 로를 돕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느낀다”며 “이번 행사를 보며 위기에 강한 우리 민족은 반드시 이번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회복했다”고 말했다.
역사가 짧아 아직 뿌리가 깊지 못한 베이징 한인사회에서 IMF의 삭풍을 뚫고 한가닥 희망의 씨앗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김성환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8일 제 1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