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김순경의 맛기행

한으로 빚은 조랭이떡국

신정이나 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떡국을 끓여 먹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해가 바뀔 때마다 끓여먹는 떡국이지만 개성(開城) 지방의 조랭이 떡국 은 그 모양이 독특하고, 예로부터 개성 편수와 보쌈김치 등과 더불어 개 성지방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손꼽혀 왔다. 깔끔하고 맛깔스럽기 이를 데 없다는 개성 음식 중에서도 새해 첫 아침에 먹는 조랭이 떡국은 그 쫄깃 하고 부드러운 맛이 안겨주는 인상만큼이나 깊은 한과 섬뜩한 사연을 안 고 있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고려의 재건을 뿌리째 봉쇄하려고 왕족은 물론 고려왕조의 벼슬을 지낸 친족들까지 남자들은 모조리 거세하려 했다 . 그래서 왕씨 성을 가진 남자들은 전(全)씨 또는 옥(玉)씨 등으로 위장 하고 시골로 낙향하거나 장사길에 나서게 됐다고 한다. 이같은 모진 획책 에 분을 느낀 개성 여인들은 이성계에 대한 한을 한시도 잊지 못해 떡국 을 끓이려고 조랭이 떡을 썰면서도 이성계의 목을 연상하며 그의 목이 떨 어져 나가기를 기원했다는 것이다. ‘대칼로 목을 베어야 한다’는 개성 지방의 욕설도 이때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전주 이( 李)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조랭이 떡국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조랭이 떡국의 유래가 여기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개성사람들의 한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그 이전부터 개성 음식으로 명맥을 이어왔는데 만드는 방법이 이같은 한을 담기 알맞았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설명이 좀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조랭이 떡은 일반 떡가래처럼 길쭉길쭉 빗썰지 않고 동전을 포갠 것처럼 둥글게 썰어 그 가운데를 대칼로 문질러 마치 누에고치나 앵두알이 두개 씩 겹친 것처럼 동글동글하고 예쁘게 빚는다. 그래서 개성음식점에는 기 름이 반지르하게 밴 대(竹)칼들이 있는데 떡가래를 놓고 문지르는 모습이 마치 무엇을 모질게 자르는 것처럼 보인다.

동대문구 용두동 용두시장 골목에 들어있는 개성집(02-923-6779)은 개성 조랭이 떡국은 물론 편수와 보쌈김치, 개성순대와 개성식 신선로 등 개성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집이다. 주인인 김영희(7 0) 할머니가 개성 태생이고 음식을 직접 만들어 내는데, 그 맛이 개성의 옛맛 그대로여서 이제는 실향민이 된 개성사람들이 고향의 향수를 그리며 찾는 모임장소로도 이름나 있다.

방앗간에서 금방 뽑아온 흰떡을 식기 전에 다시 손으로 가늘게 밀어 동전 잎처럼 썰어 놓으면 식구들이 둘러앉아 대나무 칼로 본격적인 조랭이 떡 을 만들어 달라붙지 않게 채반에 받쳐 놓는다. 떡국을 끓일 때는 제국물 에 알맞게 넣어 떡이 떠오르도록 푹 끓여 파와 양지 무친 것을 조금 얹는 다. 따라 나오는 밑반찬도 간결하다. 나막김치와 채나물 한가지 정도이고 , 설날이나 돼야 후식으로 강정과 식혜가 곁들여 나온다.

개성집은 옛부터 전해오는 그대로 갈비와 양지를 삶아 달고 깔끔한 국물 에 조랭이 떡을 끓여 낸다. 손님들이 원하면 배추김치와 나물 무친 것도 곁들여 내기도 하지만, 원칙으로는 채나물과 개성식 오이소박이가 전부다 . 떡국도 국물이 자박자박할 정도로 국물을 적게 잡아 국보다는 떡맛을 더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그만큼 조랭이 떡은 떡맛 그 자체가 진미다.

금방 끓여놓은 조랭떡은 일반 떡국에 들어있는 가래떡에 비해 훨씬 부드 럽고 쫄깃하게 씹히는 질감이 감미롭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나 노인들까지도 먹기 편하고, 한번 조랭이떡국으로 설을 새고 나면 이듬 해에도 영락없이 조랭이떡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일반 가래떡은 끓였다 식히면 풀어져버리지만, 조랭이 떡은 먹다 남은 것까지도 떡을 건져내 찬물에 헹구어 놓으면 새떡이나 다 름없게 된다. 이것을 다시 국물에 넣어 푹 끓이면 전혀 표가 나지 않는 조랑떡국으로 되살아나 개성여인들의 알뜰한 음식지혜까지도 엿볼 수 있 다.


개성사람, 고향의 맛 못잊어!

개성집은 명절이 되면 여간 바쁘지 않다. 고향이 개성인 부모를 모신 개 성출신 2∼3세대들은 조랭이떡국을 끓여내야 하는데, 떡빚는 대나무칼이 며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일 형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 떡을 주문해가기 때 문이다.

개성집에서는 밤을 지새가며 조랭이떡을 빚어 10kg 한말에 8만원, 2kg에 1만6천원을 받고 조랭이떡을 빚어준다. 신정이나 설 쇠기 3∼4일전쯤 미 리 주문해야 제날짜에 맞춰 별미인 조랭이떡국으로 설을 쇨 수 있다고 한 다.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8일 제 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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