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문화

꿈꾸는 영화, 웃기는 세상

여균동 감독이 세번째로 만든 영화 <죽이는 이야기>는 영화의 현실과 꿈 에 대한 이야기다. 그 현실은 여관 종업원이 불법 포르노 비디오를 만들 어 팔고, 감독이 제작자에 의해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 야 하고, 제작자의 침대 위에서 주연 여배우가 결정되는 것이다.

3류 배우들이 훌륭한 영화 제작자와 감독을 통해 최고의 스타가 된다거나 ,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작품성이 높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 칸영화제에 간다거나, 작위가 없는 생생한 현실을 찍음으로써 영화적 현실을 극복하 는 것은 영화의 꿈이다. 물론 냉정한 현실은 이런 헛된 꿈을 비켜나가기 마련이다.


머리는 예술영화, 몸은 에로영화

여균동 감독의 분신인 구이도(문성근)는 “작품은 괜찮은데 흥행은 안된 ” 영화로 빌빌대는 영화감독이다. 그는 제작자를 만나 최근 자신이 구상 한 ‘죽이는 영화’를 설명한다. 여관종업원이 몰래카메라로 훔쳐보던 여 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슬프고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다. 제작자가 제 시한 조건은 자신의 정부인 말희(황신혜)와 하비(이경영)를 출연시키라는 것이다.

말희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이 “내일은 내일 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혹은 ‘내일은 또다른 날이야’)”라고 말한 것을 “내일은 날씨가 맑을 거야”로 잘못 알고 있는 3류 에로배우. 여배우는 무조건 영화에 예쁘고 섹시하게 나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건달같은 하비는 왕가위 감독이 즐겨쓴 스텝프린팅 기법이 낭자한 누아르 영화를 꿈꾼다. 자신의 배역을 키워달라며 구 감독에게 수표 2장을 내민 다. 구멍가게 주인 딸내미로 철모르는 춘자(전이다)는 알몸 대역이라도 좋으니 영화 출연만 시켜달라고 조른다. 구 감독의 부탁을 받은 여관 종 업원(고구마)은 ‘생’포르노를 몰래카메라로 찍어대는 데 재미를 붙인다 .

이들의 뒤엉킨 요구 속에서 구 감독은 정신분열증에 걸릴 것 같다. 자신 을 창녀라 부르며 학대하고 영화를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한다. 그 래도 영화는 만들어야 한다는 타협으로 물러선다. 포기와 절망에 빠진 그 를 위로하는 이는 다름아닌 춘자. 구 감독은 여관종업원이 몰래 찍은 ‘ 생’포르노에 우연히 등장한 춘자의 모습을 보며 사랑에 빠진다.

감독이 ‘죽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후로 선택한 수단은 현실 그 자 체를 찍는 것이다. 두 배우가 요구하는 영화적 현실은 너무나 우스꽝스러 워 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여관 종업원과 짜고 말희와 하 비를 여관으로 끌어들인 감독은 둘만 남겨놓은 채 빠져나와 비디오 모니 터를 주시한다. 둘은 티격태격하더니 이내 본능에 몸을 맡긴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생긴다. 옛정을 회복한 말희와 하비는 꾀를 내 제작 자와 구 감독을 제거한다. 구 감독의 영화는 두 사람의 의도대로 느끼한 멜로+누아르 잡탕 영화로 바뀐다. 구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변질되는 것 을 참을 수가 없다. 자신이 찍은 두 사람의 ‘생’포르노를 보내 협박하 지만 곧 ‘음란물 제조 및 배포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경찰에 잡혀간다 .

덧없는 꿈이 냉엄하고도 완강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무너져가는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다. 덧없는 꿈은 다름아닌 영화다. 비디오가게 주인과 다방 아가씨가 여관에서 어울리며 자신들의 애틋한 사 랑에 눈물을 터뜨릴 때도 관객들은 웃는다. 현실은 그렇게 우스운 일이 아닌데도 영화니까 웃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일종의 메타영화(영화에 대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 속 현실과 영화 속 꿈이라는 두 가지 영화 속 공간이 존재한다. 감독은 영화의 현실 과 꿈을 컬러와 흑백으로 구분해 보여줌으로써 두 가지가 전혀 다른 문제 라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부지불식간에도 관객은 컬러의 현실이 흑백의 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죽이는 이야기>는 여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뿐 아니라 영화에 대한 지식 을 여러 가지로 동원했다. 이를테면 주인공 구이도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에 나오는 등장인물 ‘귀도’와 관련이 있고 등장 인물들이 꿈 을 꿀 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미션 임파서블> <시네마 천국>의 음악 이 등장한다. 여관에서 찍는 ‘생’포르노는 ‘빨간마후라’류의 아마추 어 포르노에 대한 풍자다. 그 밖에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 많다.


꿈과 현실의 이율배반… 실컷 조롱하라

일반 관객을 위한 배려도 있다. 이 영화에서 말희도 벗고, 춘자도 벗고, 다방 아가씨도 벗는다. 여 감독의, 혹은 관객들의 성에 대한 지칠 줄 모 르는 욕구를 배려한 것이다. 특히 엿보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몰래카 메라도 자주 등장한다. 코믹한 분위기는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면서 시종 일관한다. 춘자로 나온 전이다와 여관 종업원으로 나온 고구마(밴드 삐삐 롱스타킹의 보컬이었던 권병준)의 싱싱한 연기를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재 미다.

영화 <죽이는 이야기>가 끝나면 씁쓸함이 남는다. 구이도같은 어설픈 진 지함은 현실을 뚫고 나가지 못하며, 말희와 하비같은 엉터리들은 세상을 지배하기도 한다. ‘생’포르노를 찍던 여관 종업원은 깡패(최민수)에게 짓터지고, 춘자는 애인과의 섹스 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 탓에 아버지 에게 머리채를 잡힌다. 영화는 그렇게 허망한 짓이다. 그러나 관객들이 그렇게 허망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그저 죽이게 웃겨주는 이야기니까 . 98년 1월1일 개봉.

김규원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8일 제 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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