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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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갈수록 거세지는 태풍 속을 서둘러 벗어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재벌의 지배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 전경련 회장단 회의 모습.)
“국가부도 상황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공약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선장자리를 넘겨받게 될 ‘대한민국경제호’가 태풍 속에서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갈수록 거세지는 태풍 속을 서둘러 벗어나지 못하면 언제 좌초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한때 멈칫 하던 외환위기가 선거가 끝난 지 5일 만에 1달러=2천원이라는 사상 최악 의 상태로 악화된 것이다. 외채가 무려 2천3백75억달러에 이르고, 특별한 대책이 없는 한 연말 외환보유고가 15억달러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도 새로 드러났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아예 우리나라를 ‘국가부도 1순위’로 꼽았다. 이러다가는 정말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유예)을 선 언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팽배하다.
IMF 요구보다 더 센 구조조정을
경제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단순하지만, 한결같은’ 처방을 제시하고 있 다. IMF 협약 이행을 위한 구체적 조치를 서둘러 실행에 옮기라는 것이다 . 대우경제연구소 이한구 소장은 “외환위기의 뿌리는 외국인투자자들이 우리 정부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IMF 구제금 융을 받은 뒤 한달 동안 정부가 내놓은 이행조치들은 너무 부실했고, 외 국인들은 그나마도 정부가 스스로 약속을 파기할지 모른다고 의심해왔다 ”고 덧붙였다. 강철규 서울시립대 교수도 “대외신인도가 계속 하락하는 것은 해외투자자들이 바라는 구조개혁이 거의 진척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이같은 지적을 이미 충분히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당선자 는 당선이 확정되자 곧바로 “IMF협약을 100% 이행하겠다”고 굳게 약속 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재협상 발언에 대해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 히 파악하지 못하고 한 발언”이라고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금융산업 구 조개편을 지원하기 위해 13개 금융개혁법안도 정기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태해결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외 환위기는 일시적으로 완화된다고 해도 근본적 처방이 없이는 재현될 수밖 에 없고, 지금까지 정부가 그래왔던 것처럼 때를 놓치면 놓칠수록 더 많 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금융연구원 최공필 연구위원은 “IMF의 요구대로 부실 금융기관들을 즉각 정리해 불필요하게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우선 막고, IMF의 요구보다 더 강도가 높은 구조조정을 시행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들불 이 뒤쫓아올 때는 오히려 앞에 불을 지르고 불을 따라가야 살 수 있다는 논리다. 대우경제연구소 한상춘 연구위원도 “국내 경제에 주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장기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기 보다는 충격이 크더라도 즉각 적인 부실 종금사의 폐쇄, 은행의 과감한 인수합병(M&A) 등 금융산업 구 조조정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같은 주장에 대해서는 반 론도 만만치 않다. 취약한 경제체질상 건실한 기업들조차 그 충격을 결코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은행을 외국투자 자에게 인수시키는 것도 취약한 우리 금융산업을 황폐화 시킬 것”이라며 , “아직 시간이 있는 만큼 자구노력을 계속하게 하고 끝내 안 되면 차라 리 파산시키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반론은 갈수록 설 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른바 ‘비상사태’라는 현실을 무시한 안일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고통은 이제 시작일 뿐…
무엇보다 재벌경제체제의 수술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대외신 인도 회복을 위해서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우리경제의 새틀을 짜나간다는 차원에서 당장 본격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사실 우 리 경제의 부실화는 재벌의 과다한 차입경영과 이를 통한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재벌 계열사간 부당한 내부거래와 상호출자, 그리고 상호지급보증을 해소하는 조치를 앞당겨 단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외국인투자자들은 경영실적 이 건실한 기업에 투자를 하고 싶어도 그 돈이 부실한 계열사를 살리는 데 허비될 것이라는 불신을 뿌리깊게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사태의 호전 을 가로막고 있다.” 장하성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고려대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자구노력을 가속화하지 않는 부실기업은 이제 과감하게 정리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기획실, 비서실 등 법적 근거가 없는 조직도 폐지하라고 요구한다. 기업경영의 감시를 위해 소액 주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입법조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요구돼 왔다. 최근 IMF가 부실은행의 주주들에게 경영을 감시하지 못한 책임을 묻도록 요구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부는 할말이 없다. “도대체 우리가 주주로서 무슨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느냐”는 주주들의 반박이 오히려 두렵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금융기관이든 일반 기업이든 구조조정을 가속화하 려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실업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다. 이한구 소장은 “기업의 구조조정을 촉진하지 않는다면 부도사태로 어차피 실업 이 확산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정리해고제의 조기도입이 필요하다 는 것이다. 강철규 교수도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제고돼야 한다”며 유 보된 정리해고제를 한시적으로 도입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물론 인수합병 등 일정한 조건 아래서만 해고를 하고, 인력을 늘릴 경우 우선적으로 재 고용을 보장하는 한편, 정부가 실업구제를 위해 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 한다는 전제 아래서다. 이한구 소장은 임금삭감의 경우도, 필요하다면 관 련법을 개정해 주식으로 임금을 대신 지급하거나, 스톡옵션제도를 도입하 는 등의 방법으로 고통과 과실을 나눠야 한다고 말한다.
이같은 처방들은 사실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 노·사·정 사이에 합의를 창출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이 우 려되는 것이다. 장하성 교수는 사회적 합의없이 노동자들을 무작정 실업 으로 내몰 경우, 극한 반발로 더 큰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해 이철수 한국은행 노조위원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 그는 “고통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감내해야 할 고통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정부든 기업이든 노동자든, 지 금의 위기를 넘기기만 하면 머잖아 사태가 나아지리라는 생각은 위험천만 이라는 얘기다. “김 당선자는 국민에게 인기를 얻는 대통령이 될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의 재건을 위해 필요한 고통을 각각의 경제주체가 적절히 분담시킬 수 있도록 조절하는 일도 김 당선자와 그가 이끌어갈 새 정부의 중요한 과제다.
무기명장기채 효과 의심스럽다
재벌경영체제와 결합해 우리 경제를 좀먹어온 주범인 관치금융과 정경유 착도 청산해 나가야 한다. 정치권이 고용보험재원을 마련한다는 명목 아 래 무기명장기채를 발행하고, 금융소득종합과세제도를 유보함으로써 사실 상 금융실명제를 폐지하고 나선 것은 정치권의 개혁의지를 의심하게 만드 는 대목이다. 이한구 소장은 “무기명장기채는 효과도 의심스럽고, 나쁜 선례만 남길 가능성이 크다. 상속세나 증여세를 탈루하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가장 나쁜 폐해인 정경유착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 했다. 강철규 교수도 “부실채권을 몇조원씩 해소하는 정부가 고용보험 재정 마련을 위해 무기명장기채 발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비판했다. 금융감독기구와 관련해서도 이철수 위원장은 “통 합금융감독기관이 재경원 관료들의 양로원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고 경고하고 있다. 기업들은 그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규제의 폐지를 한목소 리로 요구해왔다. 자유경쟁을 위한 진입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 이지만, 이같은 조치는 불공정한 거래행위에 대한 감시의 강화와 함께 이 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IMF의 자금지원은 결코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한국경제의 불안이 세계경제에 끼치는 부작용을 차단하는 것이 그 목적일 뿐이다. 이제 그 엄청난 고통을 보상받는 길은 그동안 우리 스스로 개혁하지 못한 부실한 경제체제를 이번 기회에 털고 일어서는 것뿐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선거 전이 벌이지는 동안 “1년 반 안에 IMF체제를 극복하겠다”고 말했다. 최 근에는 2년으로 그 시한을 늘렸다. 그 기간은 물론 짧을수록 좋을 것이다 . 그러나 허약한 경제체질을 수술하지 못한 상태에서라면 IMF를 조기졸업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남구 기자
최동
세(한국개발연구원장)
© 한겨레신문사 1998년01월08일 제 1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