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세계의 영웅

한국/스타만 있고 영웅은 없다

(사진/박찬호는 스타일지언정 영웅은 아니다.)

한국엔 과연 ‘보통사람들에 의해 추인된 성실한 지도자’란 의미의 ‘영 웅’이 존재할까. 지난 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기 ‘영웅’ 이었다. 공직자 재산등록, 금융실명제 등 개혁조처를 취했던 시기 김 대 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90%까지 올랐다. 당시 많은 꼬마들의 장래희망이 ‘김 대통령과 같은 인물’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올해 들어 김 대통령의 인기는 바닥세다. 김 대통령은 ‘복제해서는 안 될 인간’의 첫손가락에 꼽혔고, 이에 지난 6월 독일의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는 그를 ‘추락한 영웅’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대선 후보들에 의해 ‘나라를 망 친 인물’로 낙인찍힌 상태다.

김 대통령의 추락과 함께 일부에서는 ‘박정희 영웅만들기’가 진행되고 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의 신문 연재물과 이대 교수 이인화(31) 씨가 소설 <인간의 길>에서 살려내려는 박정희는 ‘근대화를 이룬 영웅’ 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당시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졌던 보통사람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코 ‘영웅’일 수 없다.


박정희 영웅 만들기의 허구

올 여름 ‘영웅 박찬호’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배경에는 이런 영 웅없는 정치판이 큰 작용을 했다. ‘정치인은 모두 도둑놈’이라는 국민 들의 인식이 공직사회 밖에서 영웅을 찾게 한 것이다. 하지만 박찬호는 스타일 수는 있어도 영웅은 아니다. 그는 ‘불만의 배출구’는 될지언정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웅없는 시대는 ‘거짓 영웅’들을 양산하기도 한다. <모래시계>를 쓴 방송작가 송지나씨는 언젠가 “세간에서 <모래시계> 속 깡패를 영웅시하 는 데 놀랐다”고 고백한 바 있다. 드라마에서 깡패의 대칭으로 내세웠던 정의로운 검사는 오히려 깡패만큼 영웅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 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전도된 현실에서 찾았다. 바로 장 세동과 같은 ‘악한 인물’이 ‘의리의 화신’으로 영웅시되는 분위기 말 이다.

그럼 과연 우리의 영웅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민중들은 ‘잃어버린 영웅 찾기’의 새출발점으로 오는 12월18일 대선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웅찾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거짓 약속’에 현혹되지 않는 ‘작은 영웅’들의 깨어 있는 비판의식이 전제돼야 한다.

김보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