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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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한때 인민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진정한 영웅이었다.)
“영웅 리수리(李素麗)를 아십니까.”
지난해 말 중국 <런민일보>(人民日報) 등에 ‘사회주의영웅’으로 소개됐 던 리수리의 존재는 1년여가 지난 지금 대부분의 중국인들의 머리속에서 사라졌다. 베이징시내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이 ‘영웅’에 대해 물어봐도 대부분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한참을 “리수리…?” 하다가 비로소 “아!” 하고 말문을 연다. 다른 ‘사회주의영웅’처럼 이 ‘관제영웅’도 1년짜리 운명을 다한 것이다.
1년이 지나면 까맣게 잊는다
리수리는 지난해 말 공산당과 관변 매체가 주도하는 ‘영웅 만들기’에 의해 탄생한 영웅이다. 중국 사람들은 어느날 느닷없이 모든 언론매체에 서 일제히 생소한 인물을 다루기 시작하면, 곧 또 한 사람의 영웅이 탄생 되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지난해 말 리수리도 꼭 그렇게 등장했다. 96년1 0월 어느날 <런민일보>와 <중앙텔레비전> 등 중국의 언론매체는 베이징의 평범한 버스 안내원인 리수리를 갑자기 등장시켰더 것이다.
<런민일보>를 비롯한 각급 신문과 방송은 리수리가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의 표본’이라고 입을 모았다. “리수리를 본받자!” “리수리처럼 하자!”는 등의 구호가 사방에 나붙고, 심지어는 리수리가 일하는 버스를 타 보았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작문경시대회까지 열렸다. 일명 ‘리수 리 현상’으로 불린 이 열풍은 중국 정부가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 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전국으로 열기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리수리는 그 등장의 갑작스러움만큼이나 퇴장도 어느날부턴가 빠 르게 이루어졌다. 공산당의 관심이 다른 문제로 옮겨가면서 리수리의 이 름은 순식간에 텔레비전 및 신문지상 그리고 거리에서 일제히 사라진 것 이다. 그리고 1년 뒤인 현재 ‘영웅 리수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이는 오늘날 중국에 진정한 국민적 영웅이 없는 이유를 비교적 안정 된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찾기도 한다. 베이징대학 대학원의 한 사회학 도는 “최근의 눈부신 경제적 성공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 타”라는 말로 요즘 상황을 표현한다. 모든 이들이 돈벌기에 정신이 없는 중국 사회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대중적 영웅을 별로 필요 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상황이 어두울수 록 영웅은 빛난다”는 경구의 반대 상황이 바로 지금의 중국이라고 말한 다. 이재에 밝고 정치적으로는 무관심한 중국인 특유의 현실 감각을 잘 반영한 분석같아 보인다.
진정한 영웅은 이제 없는가
하지만 상황을 전혀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베이징의 한 대학교수는 “진정한 영웅이 없는 사회는 앞길이 암담한 사 회”라고 말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없는 중국혁명과 덩샤오핑(鄧小平) 없는 개혁개방은 상상조차 힘들다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마오쩌둥은 문 화대혁명을 계기로 그리고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중국 인민들 에게서 멀어져 갔지만, 이들은 모두 한때 인민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 았던 진정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어 날로 개방되는 사회에서 더이상 과거와 같은 영웅의 탄생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그의 설명 이다. 중국은 모든 면에서 하루가 다르게 개방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반면 , 인민들의 민주적 권리에 대한 낮은 인식과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는 ‘관제 영웅’ 외에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는 국민적 영웅의 탄생 을 근본적으로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이 정치적으로 좀더 성숙되 고 개방되지 않는 한 “진정한 영웅이 다시 등장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단언한다. “리수리 같은 50∼60년대 노력영웅은 이제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했다. 당이 내세우는 표어와는 달리 아무도 리수리를 본받으려고 하 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베이징=김성환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