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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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짜리 최안나(가명)는 하와이로 가는 배에 올랐다.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며 깊숙이 넣어뒀던 사진을 꺼냈다. 그는 지금 사진 속 남자와 사 진으로 맞선을 보고 결혼하러 가는 길이다. 배에는 최안나 같은 소녀들이 다섯명 타고 있었다. 1915년의 일이다. 태평양을 건너는 데 석달이 걸렸 다. 신부들이 멀미로 시달릴 때마다 인솔자는 꿈의 섬 하와이, 신비로운 낙원 하와이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거기선 옷이 나무에 열리고 과일들이 땅에 떨어져 썩는다고. 품삯은 쓸 데가 없어 고스란히 쌓인다고.
이윽고 도착한 신부들은 이민국으로 향했다. 닷새 뒤, 드디어 최안나의 ‘그이’가 나타났다, 사진과는 달리, 웃으면 얼굴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패고 손마디가 굵은 46살의 사탕수수 농장노동자였다. 당시 하와이 사탕 수수 농장에는 약 7천명이 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1902 년부터 나라의 권장 아래 집단노동이민이 실시된 결과였다. 대부분 미혼 남성들인 이들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결혼이었다. 이들은 고향에 사진을 보내 신부감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미국 이민국과 사탕재배회사도 이 사진결혼을 적극 장려했다. 그런데 남자들이 보낸 사진은 처음 이민갈 때 찍은 거라 실제보다 10년은 젊었다. 자기보다 잘생긴 친구의 사진을 빌려 보낸 사람도 있었다. 낡은 사진 한장을 믿고 바다를 건너온 신부들은 신 랑감의 모습에 실망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진결혼을 한 부 부들은 나이차가 많고 또 남편이 먼저 죽어 과부가 되기 일쑤였다.
사진신부의 숫자는 모두 1천여명. 최초의 사진신부는 1910년 11월28일 하 와이에 도착해 이래수와 결혼한 최사라다. 한데 사진신부들은 무슨 생각 으로 하와이를 결심했을까? 돈을 벌어 딴 세상에서 살고 싶어서, 가부장 제의 희생물이 되기 싫어서, 조국을 되찾을 독립운동을 하려고…. 이유는 갖가지였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가난과 막막한 미래를 떨치고 새로운 세 계로 가고픈 동경이었다. 그러나 꿈에 부푼 신부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사탕수수 농장의 중노동과 차별대우였다. 탁아시설이 부족하고 보육비가 턱없이 비싸서 아이가 태어나면 더 힘이 들었다. 의료혜택을 받기도 어려 웠다.
그래도 사진신부들이 온 뒤로 하와이 이민사회는 눈에 띄게 안정됐다. 신 부들은 돈을 모아 농장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나갈 꿈을 꾸었고, 하와이 에 살던 한국인 가운데 2천여명이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 스 일대로 이주했다. 오늘날 미국 서부 한인사회의 기초가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먹고 사는 일, 자식 가르치는 일,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 국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는 일, 이 세 가지를 위해 뼈빠지게 일했다. 하 와이와 미국 서부지역이 독립운동의 주요 무대가 될 수 있었던 건 이들 덕분이었다.
사진결혼은 1924년 중단됐다. 미국이 아시아인의 이민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뒤 미국 이민은 미군과 결혼해 건너간 세칭 전쟁부인과 입양 아로 대변된다. 1965년 미국 이민법이 개정되자 미국은 한국인에게 다시 꿈의 나라로 다가섰다. 그러나 새로운 이민자들은 초기 이민자들의 삶을 알지 못한다. 초기 이민자들과 이들 사이에 두터운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
오늘도 미국대사관 면접 창구 앞에는 한국인이 줄지어 서있다. 딱히 이민 이 아니어도 학업, 비즈니스, 친지방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 갈 비 자심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다. 이상하게도 여성이 많다. 유리 칸막이 저 편에 앉은 미국인이 서류를 들춰보며 순식간에 가부를 결정한다. 결정의 잣대는 ‘미국인이 보기에 불법체류자가 될 성싶은가 아닌가’이다. 이혼 이나 사별로 배우자가 없는 여성, 든든한 직장과 미국인이 인정할 만한 고소득을 수치로 입증해내지 못하는 여성은 관광조차 갈 수 없는 미달인 생 취급을 받는다. 한국여성을 보는 미국의 눈은 80년 전 사진신부 때나 40년 전 전쟁부인 시절이나 지금이나 같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