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삶

'관광 태백'의 희망 시민기업

(사진/낮은 채산성으로 그나마 곧 폐광될 것이라는 소문에 시민들의 불안이 깊어가고 있다. 지난 2월 종합개발계획 발표와 함께 부동산 붐이 불기도 했던 태백시. 거품은 빠졌지만 '관광태백'은 여전히 태백을 지키는 이들의 희망이다.)

IMF체제의 거대한 암운은 이 사회의 '막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천길 낭떠러지기에서 삶을 근근이 퍼올리다 이제는 그 막장마저 사라져버 린 폐광지역 주민들의 마지막 안간힘에도 한파를 내리쏟아 붇고 있는 것 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싻을 키우려는 이들의 노력은 끈질기다. 사실 더 는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기에 이들에겐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그 노력의 맨 앞장에 서있는 것이 태백시민들의 시민주로 이루어진 태백고원관광레저개발시민주식회사다.


지역경제 살리자 시민 2천1백64명 뜻모아

시민기업은 그동안 폐광에 따라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주민들 2천1백64명 으로부터 자본금 14억원을 추렴해 세워졌다. 또 이미 강원도로부터 탄광 지역 종합개발계획의 39개 민자유치 대상사업 가운데 하나인 백병산스키 장의 사업자로 지정받았다. 이를 위해 사업구역의 사유지 11만평 가운데 8만평을 매입해놓고 다른 민간업체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그러 나 이들이 모아둔 자본금으로는 스키장 사업에 턱없이 부족하다. 때문에 시민기업은 지난 11월5일부터 자본금을 6억원 더 늘린 20억원으로 하고 주주를 3천명쯤으로 불리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설정하고 신주 주식공모 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장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황에 따른 폐광지역종합개발계 획 시행의 지체와 설상가상격인 IMF사태였다. 종합개발계획의 재원확보 가능성이 총체적으로 불투명해진 것이다.

지난 2월 정부가 최종 확정한 폐광지역 종합개발계획은 핵심사업인 카지 노리조트사업을 제외하고도 관광레저, 지역특화, 기반시설사업 등 3개분 야에 모두 2조5천4백억원의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이 가운데 민간에서 확보하기로 한 자금은 전체 투자규모의 76%인 1조9천2백 억원. IMF 관리체제를 졸업할 때까지 상당기간 온나라가 허리띠를 졸라매 야 하는 상황에서 대부분 금융기관 차입과 리조트 회원권 판매 등에 의존 해야 하는 민간자본이 계획대로 조달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도로개설과 하천정비 등 기반시설사업에 소요될 국비 4천3백억원과 지방 비 1천7백억원의 확보도 낙관할 수만은 없다. IMF의 권유에 따라 이미 정 부에서 내년 예산 가운데 10% 가량을 삭감하는 작업에 착수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시민기업은 당장 내년 10월 말 착공을 목표로 백병산스키장 건설사업을 추진해왔다. 총사업비 1천9백66억원의 80.5%인 1천5백84억원을 회원권 판 매로 조달하기로 계획했었다. 지난 5일부터 신주공모에 나서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IMF의 구제금융 한파가 몰아닥치 면서 내부 분란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주공모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회의론이 이사진들 사이에서 제기된 것이다.

사실 이런 회의론은 객관적인 자료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 다.


꺼져가는 불길살리기에 진폐환자까지 동참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이 제정된 95년 말 현재 6만4천8백명선이었던 태 백시 인구는 96년 말 6만2천4백여명으로 2천4백여명이 줄었다. 그리고 지 난 10월 말 현재 6만6백여명으로 10개월 만에 다시 1천8백명이 줄었다. 태백시 인구는 지금도 매달 1백명꼴로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태백시 경제에 그나마 숨통을 터주고 있는 석탄공사 장성광업소와 한보에너지 통보광업소가 IMF체제의 영향을 입기 쉽상이어서 태백시민들 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적자운영을 계속하 고 있는 두 기업에 대한 지원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 두 광업소는 태서광업소와 함께 총 3천6백여명의 직원 임금으로만 다달이 50 억여원을 태백시에 쏟아부으며 빈사상태의 태백시 경기를 떠받쳐왔다. 따 라서 개발사업이 미처 시작되기 전에 이들 탄광이 문을 닫으면 태백시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설사 몇년 뒤 개발사업 이 본격화된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 태백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리 많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이런 회의론은 광원의 직업병인 진폐증에 걸려 가쁜 숨을 몰아쉬 고 있는 진폐환자들까지 주식청약 대열에 가세하면서 잦아들었다. 산재의 료관리원 태백중앙병원에서 입원치료중인 진폐환자 30여명이 주식공모 첫 날 주식청약을 한 데 이어 집에서 요양중인 진폐환자 1백여명도 주식을 청약할 뜻을 밝히고 나선 것이다. 또 홍순일 태백시장이 2백주를 청약한 것을 시작으로 태백시 공무원들이 ‘시민주갖기운동’에 나섰고, 황지자 유시장조합 상인들도 조합차원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기로 하는 등 태백시 각 기관·단체에 시민주갖기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을 얻은 듯 하일호 대표이사는 “지역의 소규모업체 여 러 곳에서 부도설이 나오고 있을 정도로 지역경제가 어려운 형편이어서 6 억을 더 모으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면서도 “지금까지 쉽게 된 적이 한번도 없는 만큼 열심히 뛰면 이번에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이런 가운데 멀리 바다 건너에서 날아든 기쁜 소식은 시민기업 관계자들 에게 IMF 한파를 녹이는 훈풍이 되고 있다. 미국계의 한 자본이 시민기업 이 계획하고 있는 사업에 거액을 좋은 조건으로 투자하겠다고 제의해온 것이다. 외국에서 자금지원 의사를 밝혀온 것은 시민기업이 지역주민이 주체가 된 지역개발의 새로운 모델로 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데 따른 결과였다. 시민주식회사의 창립과정과 활동은 국내에서 대학의 학위 논문의 연구대상이 되고, 독일의 한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설 정도로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런 훈풍에 힘입어 시민기업은 “국토이용계획 변경 등의 절차만 차질없 이 추진되면 내년 10월부터 예정대로 공사에 들어간다”는 애초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태백시의 분위기와 비교해보면 재(싸리재 해발 1,268m)너머 정선군 고한·사북읍 지역의 상황은 매우 암울하다.

고한읍의 거리는 언제나 휴일같다.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데다, 문을 닫은 가게가 문을 연 가게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고한읍은 요즘 관내에 마지막 남은 탄광인 삼척탄좌가 곧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으로 뒤숭숭하다. 물론 회사쪽은 부인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불안감에 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불안감의 불씨는 삼척탄좌 노사가 지난달 26일 회사가 부득이 직원을 감원할 경우 회사를 떠나는 직원들에게 퇴직금과 별도로 통상임금 6개월분의 위로금과 이주비 80만원을 지급한다는 데 합 의했다는 소식이었다.


“모두 떠난 뒤 카지노가 무슨 소용이오”

삼척탄좌는 최근 해마다 석탄생산량을 전년보다 20% 안팎으로 줄이면서도 사외도급업체를 제외한 모광 종업원에 대해 강제 감원은 실시하지 않았다 . 정년퇴직, 자진퇴사 등에 의한 자연감소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올들어 지난달 말까지도 전체 생산직 종업원 6백70명의 19.4%인 1백30명 이 정년퇴직이나 자의로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월별로 보면 올 하반기부터 감소추세가 뚜렷이 둔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들어 지난 7월까지는 1백7명이 회사를 나가 월평균 15명이 감소했으나 8월부터는 월평균 6명 가량이 줄어들어 감소율이 절반으로 떨 어진 것이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자녀 학자금지원을 포기하지 못해 떠 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살길을 찾아 떠날 사람들은 다 떠나고 이제 는 정말 갈 곳이 없는 사람들만 남았다”고 자연감소율이 줄어드는 배경 을 설명했다.

이곳의 대다수 광원들은 그러나 정선군 사북읍과 고한읍 사이에 들어선다 는 카지노나 스키장, 골프장과 같은 개발계획에 냉소적이다. 고한읍의 한 개인택시기사는 “나라 경제가 어렵다며 사업을 몇년 늦춘 뒤 나중에 아 예 사업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때 가서 고한·사북에 데모라도 할 사람 들이 얼마나 버티고 있겠느냐. 정부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 했다. 다른 대다수 주민들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라 경제사 정을 감안할 때 수천억원이 투자되는 카지노리조트사업이 제대로 이루어 지리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태백·고한=김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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