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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노조원들,“동료의 절망을 나눠 마신다”

(사진/"내 동료를 떠나보낼 수 없다." 12월9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노동자들은 정문 앞에서 고용안정 쟁취 집회를 열었다.)

보이는 것은 차뿐이다.

쏘나타, 액센트, 갤로퍼, 그레이스 등이 곳곳에 쌓여 있다. 발디딜 틈이 없다. 재고 차량들을 바라보는 노동자들의 눈길이 심란하게만 느껴진다. “조것들만 보고 있으믄 착잡합니더. 빨리 나가야 하는디.” 사내 순환버 스를 기다리는 한 노동자(29)의 말이다.


사내 도로를 점령한 재고 차량들

재고 차량이 도로를 점령한 지는 이미 오래다. 이에 따라 갈수록 사내 교 통체증이 심해지고 있다. 왕복 4차선 가까이 되는 사내 도로는 이미 2차 선으로 좁아졌다. 버스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비좁은 곳도 있다. 이 때문 에 지난 11월에는 한 노동자가 교통사고로 숨지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탄 노동자가 커브길에서 재고 차량이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앞에서 오는 부 품트럭을 보지 못하고 이 트럭과 충돌한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대씩 쌓이는 재고를 보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회 사가 어렵다’는 회사쪽 얘기가 실감이 난다. “노동조합이 생긴 뒤로 지 난 10년간 회사쪽에서 경영이 좋다는 말을 내 아직 한번도 들어본 일 없 답니꺼. 마 그런데 이번에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액센트를 만드 는 승용1공장에서 부품을 나르는 윤선희(34) 조합원이 털어놓는 심정이다 .

게다가 회사쪽에서 최근 협력업체 소속 사내하청 노동자를 포함해 4천6백 97명의 과잉인력이 있다며 이를 2000년까지 줄이겠다고 밝히면서 현장 분 위기는 더욱 뒤숭숭하다.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전체 노동자의 20%에 이 르는 규모다. 공장 전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어 보였다.

그랜저와 다이너스티를 만드는 승용2공장 식당.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찾 는 노동자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2공장이 조업을 일시 중단하면서 노동 자들이 월차휴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일까. 점심식사 뒤 한무리 의 노동자들이 나누는 대화가 더욱 을씨년스럽게 들린다.

“이러다 우리 잘리는 것 아이가. 우짜믄 좋노.” 거푸 담배를 꼬나무는 한 노동자가 불쑥 말을 꺼낸다. “말도 안 된데이. 우리 잘못이가. 과잉 생산이라는 거 회사는 6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안 하나. 그라믄 뭔가 대책을 세웠어야지. 마 해고하려고 회사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고 왔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해고만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 른 노동자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역시 어깨는 움츠러들고 있었다.

지난 12월8일 그룹에서 임금을 동결하고 대규모 감원은 억제하겠다고 발 표한 것도 큰 위로가 되지 못하는 분위기다. 노동조합에서는 이전의 발표 와 달라진 게 없다고 판단한다. 경영합리화에 따른 최소한의 감원이나 인 력재배치는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은 4천6백97명을 줄이겠다는 얘기라는 것 이다. 노조는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다.


‘절망공장’으로 통하는 아산공장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회사의 과잉인력 산출 근거가 의심스럽다는 것이 다. 노조는 컨베이어벨트 속도를 줄이고, 최신 공법을 도입하면 4천명 남 짓 과잉인력이 생긴다는 주장이 졸속으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회사에서는 아직까지 새 공법 도입에 따른 1인당 작업량 변화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모답스’라고 불리는 새 공법은 기존 공법인 ‘햅스’에 비해 작업자의 동작과 여기에 걸리는 시간을 1백분의 1초 단위까지 계산해 실제 작업시 간 이외의 낭비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이 공법을 도입한 현대자동 차 아산공장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본 도요다 자동차공장에 빗대 ‘한국 의 절망공장’으로 통하고 있을 만큼 노동강도가 세다. 현재 울산공장의 컨베이어 속도는 차종에 따라 시간당 21대에서 57대를 만드는 수준인데, 한 사람이 연평균 32대를 생산하는 셈이다. 모답스 공법을 통해 한 사람 이 연간 45대를 만들어내는 일본 도요다 자동차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게 회사의 방침이다.

노조 박유기(33) 기획실장은 “회사의 인력조정안이 직영노동자와 사내하 청 노동자의 분열을 부추기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사내하청 노 동자는 컨베이어 속도를 줄인다는 이유로 직영노동자 대신에 해고하고, 고용 유지의 대가로 직영노동자의 노동강도는 훨씬 강화하려 한다는 것이 다. 현대자동차 직원들은 사내하청 노동자와 비교해 직영노동자로 불린다 .

하지만 회사쪽 인력조정계획에 따른다고 해도 직영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이 보장될지는 의문이다. 새 공법에 따른 여유인력 1천5백여명은 컨베이어 속도를 늦추는 데서 생기는 여유인력의 두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사내하 청 노동자를 모두 다 자르고 이들이 맡던 일을 직영노동자가 대체한다고 해도 상당수 직영노동자의 해고는 불가피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때문에 컨베이어를 타는 노동자들은 속도를 늦춘다는 게 반갑지 않다. 단 1초만 빨라져도 피부로 실감하던 이들 초단위 인생들이 컨베이어 속도를 빠르게 하지 못해 안달이던 회사에 맞서 파업을 마다않던 때에 비교하면 역설적인 상황이다. “차라리 컨베이어 속도를 유지하고 임금이 줄더라도 노동시간을 줄이는 게 낫지요. 두눈 뜨고서 동료를 어떻게 떠나보낸데요. ” 시간당 액센트 57대를 만드는 승용1공장에서 배터리 및 와이퍼 설치 등의 공정을 최종 점검하는 김아무개(36)씨의 말이다.


‘고통분담’위한 노동시간 단축 검토

1t짜리 포터 등을 생산하는 소형트럭사업부에서 일하는 한아무개(33)씨도 같은 심정이다. “40줄이 넘는 선배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안쓰럽지요 . 근무시간을 더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함께 일해야 합니더.” 한씨가 일 하는 포터 생산부서는 이미 조업 단축에 들어가 주간근무일 때는 오전 8 시부터 4시간 일하고 사내연수원에서 4시간 교육받고 5시에 퇴근한다. 야 간에는 8시간 일하지만, 잔업시간 2시간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회사 의 인력조정계획에 따르면 연말까지 소형트럭부 인원 8백70명 가운데 사 내하청 노동자를 빼고서도 직영노동자 2백62명을 줄이는 것으로 돼 있다 고 한다.

동료를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모습은 자발적으로 휴가를 사용하려는 모습 에서도 나온다. 그레이스를 만드는 김동관(37)씨는 “회사의 자금사정을 걱정해 생계가 어려운데도 남은 휴가를 쓰려는 조합원들이 많다”고 말한 다. 현대자동차 생산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총액 2백40만원에서 기본급 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6%밖에 안 된다. 연장근로와 야간근로를 하지 않 으면 20∼30%의 임금이 줄어든다. 이 때문에 이미 들던 적금을 깬 노동자 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한다.

노조에서는 최소한의 인력조정과 일자리 보전을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적 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주야 10시간씩 이뤄지던 이전의 근무형태를 오 전 6시∼오후 2시, 오후 2시∼밤 10시의 주간 2교대제로 바꾸는 문제도 고려하고 있다. “이러면 회사는 월 수십억원의 인건비를 줄일 수 있어요 .” 노조 반일효(35) 정책부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반 부장은 “수십만원 씩 임금이 깎이는데 시간 단축에 따른 고통을 얼마나 참아낼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고 했다.

사내하청 노동자 문제는 노조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지난 8월에는 맥없 이 6백30명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하청이 내쫓기 면 그뒤는 직영 차례다. 전체의 관점을 유지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박유기 실장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하지만 “하청에 대한 직영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게 사실”이라고 그는 씁쓸히 인정한다.

“언제는 한가족이라고 해놓고서…. 집에 가도 잠도 안 오고 출근하고 싶 은 마음도 없어예.” 승용1공장에서 10년간 일해온 사내하청 노동자 박아 무개(32)씨의 하소연에는 현대자동차에 대한 배신감이 묻어 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이아무개(26)씨는 “직영은 임금이 깎여도 직장이라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4시간만이라도 좋으니 직장만 있었으면 좋겠다” 고 했다. 이들은 직영이 받는 임금의 60∼70%만 받으며 직영과 거의 비슷 한 일을 해왔다.


회사에 찍히는 건 아직도 두렵다?

이들은 자신과 소속 협력업체의 이름을 싣지 말아달라고 했다. 뜻밖이었 다. 이들을 포함해 사내하청 노동자 2천5백여명 가운데 1천5백여명에게는 이미 지난 12월1일자로 사실상의 해고예고 통지서가 날아든 상태다. 오는 31일이면 길거리로 내쫓길 판이다. 그런데 뭘 망설이는 것일까. 회사에 찍히는 게 아직도 두렵다는 것일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들의 얼굴 에는 한가닥 희망의 빛이 묻어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사이에라도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이들과 헤어진 뒤 한 영화가 떠올랐다. 게리 쿠퍼가 주연을 맡은 <하이 눈>이라는 서부영화다.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당들이 찾아오는 시각 인 정오를 기다리는 한 보안관의 절박한 마음을 생생히 다룬 영화다. 12 월31일을 기다리는 이들의 심정이 아마 그 보안관과 같지는 않을까.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보안관에게는 같이 싸워줄 친구 하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현대자동차 노조가 있다. 뒤늦게나마 사내하 청 노동자 보호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에서 직영노동자와 함께 노 동시간 단축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2천5백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 자들은 직장을 잃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이뤄지면 전례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 다른 조건의 노동자들이 고 통을 나누는 역사적인 이정표가 세워지는 것이다. ‘한가닥 희망’을 기 대해 본다.

울산=조준상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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