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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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
ㅈ의원님께.
대통령선거가 1주일도 안 남았습니다.
엊그제 참으로 슬픈 일 두가지를 겪었습니다. ㅈ의원님처럼 70, 80년대 살벌하던 군사독재정권에 맞섰던 몇사람과 가벼운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중 전라도 출신 하나가 김대중씨의 능력과 정권교체의 당위성을 역설하 자 옆에서 금방 제지가 들어왔습니다. 당신 같은 황건적이 큰소리내면 오 려던 표도 도망가니 조용히 해. 황건적이라. 그래서 전라도땅은 선거철인 데도 노심초사 조용합니다.
황건적이라…
어느 후보도 전라도땅에서 유세를 한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전라도는 무 조건 김대중씨를 지지하니 그렇다라고 가벼이 넘길 일은 절대 아닙니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더욱 슬픈 말을 들었습니다. 나라가 망해도 김대중은 안 찍어. 나라가 망해도?
팍팍한 가슴을 달래려 김용택의 섬진강을 읽었습니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 물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 풀꽃,…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시인은 큰소리쳤지만 그곳은 ‘황건적’들이 사는, 아무 후보도 찾아주지 않는 땅입니다.
ㅈ의원님. 당신의 고향도 그 섬진강에서 그리 멀지는 않은 진주땅이지요. 당신 할아버지께서 몇백리만 서쪽으로 자리잡았어도 당신이 집권여당에 맞서온 경력을 접어두고 오히려 그품으로 발걸음을 돌리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윗자리를 차지해 온 경상도 사람들이 이제는 한번쯤 같은 이웃인 전라도 사람들 아픈 마음 을 헤아려 줄 때도 되지 않았는지요. 억울한 여인 하나의 한도 오뉴월 서 리를 내리게 한다는데 어찌 같은 나라에서 더불어 사는 이웃의 한을 그렇 게도 외면하고 짓밟아버릴 수가 있겠는지요. 이땅의 모든 구성원들이 평 등하게 서로 화합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 고지선의 목표가 아니겠는지요.
공개적으로 쓰는 저의 이런 글조차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 고 흐르는 섬진강 자락 이웃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 드는 것을 보면 간발의 차로 경상도 사람이 된 의원님께서 평생을 걸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이것 아닌가 싶습니다.
ㅈ의원님. 제 주변에는 당신을 아무개형이라 부르던 이가 많습니다. 30년 전 청계천 판잣집 동네에서 오직 한조각 붉은 마음 하나로 어렵고 고통에 처한 이웃들과 함께 서려 했던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리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 대다수가 이제는 형이라는 애칭을 빼고 아 무개 혹은 뒤에 욕을 붙이는 것을 보며 황건적이라는 자조적 표현을 들을 때처럼 서글펐습니다. 어렵고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던 아무개형 은 간 곳 없고 50년을 이 나라의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다가 나라가 어려 워지자 나는 책임없어 하며 대통령 내쫓고 당 이름만 바꾼 세력과 같이할 줄은 정말 몰랐다는 이야기들을 귓전에 듣고 계시는지요.
ㅈ의원님 당신은 정치학을 공부하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이른바 정치 선 진국이라는 나라들치고 경제가 조금만 나빠져도 가차없이 정권이 바뀌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는지요. 그것이 민주주의의 요체인 책임정치가 아닌가 요. 하룻밤 자고 나면 환율이 1천3백, 1천4백, 1천5백으로 마구 뛰어 불 과 몇달 사이에 국민소득이 반으로 줄어들고 백만명이 훨씬 넘는 실직자 가 생기는데도 일을 그 지경으로 만든 집권세력은 이름만 바꾸어 난 아니 야를 외치는 나라. 많은 국민들이 그말에 넘어가는 나라가 도대체 우리말 고 어디에 또 있던가요.
그 교활한 말들을 믿으십니까
지금은 책임소재를 따질 때가 아니고 문제를 해결할 때라는 집권세력과 언론들의 교언영색을 당신도 정말 옳다고 믿고 계신지요. 책임소재를 따 져 본 뒤 일을 그르친 세력은 바꾸어야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 아닌가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대통령 한 사람 힘으로 되는 일은 결코 아닐진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력이 일 을 이 지경으로 만든 참에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될 일은 아니지요.
정권이 바뀔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벌써 재벌, 안기부, 군대, 경찰 같은 기득권세력 중에서 야당에 줄서기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그들을 통해 묵은 잘못의 일단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지요.
ㅈ의원님. 야당이 여당이 되고 다시 그 여당이 야당으로 두어번만 바뀌면 우리 사회 곳곳에 정체되어 있는 썩은 물이 깨끗이 정화되고 정권의 힘으 로 수조원의 돈을 빌려 주어 나라를 이 지경에 빠뜨리는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ㅈ의원님.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십시오. 어디 몇몇 애비없는 후레 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