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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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르주 뒤비와 함께 공동 편집해 이탈리아에서 나온 <서양에서의 여성사>.)
“남자를 기쁘게 하는 것, 남자에게 쓸모가 있는 것, 남자가 어릴 때는 남자를 키우는 것, 남자가 컸을 때는 남자를 돌보는 것, 남자에게 조언하 는 것, 남자를 위로하는 것, 남자에게 삶을 즐겁고 유쾌한 것이게 하는 것― 이것들은 나이가 몇살이든 모든 여자의 의무, 여자들이 어려서부터 배워야 할 의무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1762년 교육 소설 <에밀>에서 그가 상상 해낸 여성 소피의 초상을 이렇게 그렸다. 그로부터 2백30여년이 흐른 지 금, 여성들은 그 초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루소의 시대라면, 여성의 역사라는 건 아예 생각할 수 없었다. “여성이 과연 역사씩이나 가지고 있었을까”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역사학은 20세 기 말에 와서야 “물론”이라는 답을 줄 수 있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포괄한 백인 여성사
프랑스 ‘아날학파’의 일원인 조르주 뒤비와 미셸 페로가 공동 편집한 < 서양에서의 여성사>(이하 <여성사>)는 70년대에 일어난 여성운동이 짧은 시간에 이룩한 값진 성과의 하나였다. 여성들 스스로 여성사를 쓰겠다고 나선 것, 여성사를 역사학 안에 굳건하게 자리매김한 데는 페미니즘 운동 의 힘이 컸다.
1987년 봄, 이탈리아의 라테르차출판사가 뒤비와 페로에게 발의한 뒤, 4 년여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한 5개국 역사·여성학자 72명이 열띤 토론 을 거쳐 집필한 이 책은 1991∼2년 출간되자마자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다 . 아주 오랫동안 종속적인 존재로 여겨져온 여성들이 어떻게 고유하고도 독자적인 역사를 가질 수 있겠는가에 대한 하나의 결론이 이 두툼한 5권 의 책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부터 1 차세계대전까지, 20세기의 5개로 시대를 가른 편집자들은 여성들에게 “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뒤비와 페로는 ‘여성의 역사 쓰기’란 긴 서문에서 이 대담한 기획이 시 대의 산물임을 강조하며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여성사>는 장기 지속의 역사, 즉 아주 넓은 척도에서 생각된 시간의 역사이다. 고대에서 현재까지를 포괄하며 우리가 쓴 것은 본질적으로 백 인 여성의 역사다. 우리는 동양과 아프리카의 여성과 남성이 쓴 동양과 아프리카의 여성사를 보고 싶다.”
이 시리즈는 어떤 혁명, 즉 서구사회에서의 남녀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중인 광범위한 혁명의 산물이다. 그 특징은 다원주의이다. 모순 된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면서도 여성의 역사가 진지하게 취급될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밀고 나갔다. 이 책들은 또다른 의미에서도 다원주의적이 다. 단일한 집합적 존재로서의 여성(Woman)의 역사가 아니라 여성들(wome n), 몇몇 여성들, 특정한 여성들의 역사에 관심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이 기획은 여성의 역사라기보다는 양성관계의 역사를 의도했 다. 여기에 여성의 정체성과 타자성의 원천이 있다. 남성은 여성을 어떻 게 지배하는가, 이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일 뿐만 아니라 실존적인 질문이 기도 하며, 우리가 근대와 민주주의 정체의 가능성에 접근하게 되면서 더 욱더 복잡해진다. 아직도 종교, 군대, 정치, 세가지 주요한 남성 영역들 이 여성들에게 폐쇄돼 있다. 이같은 쟁점들에 대해 우리는 결론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내년 1월 새물결출판사에서 우선 제3권과 4권이 <여성의 역사>란 제목으 로 번역돼 나올 <여성사>는 한국여성학계에도 큰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 다. 뒤비와 페로가 머릿글에서도 썼듯이, “동양의 여성과 남성이 쓴 동 양여성사를 보고 싶다”는 그들의 바람을 우리 자신이 더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사>는 우리가 한국여성사를 쓸 때 각오해야 할, 또는 부닥쳐야 할 어려움들을 미리 짚어내고 있다.
사료의 부재 극복… 국내 여성학계에 자극
페로가 은유적으로 말했듯이 ‘역사의 침묵’ 속에서 여성사를 써야 하는 것이 첫째 걸림돌이다. 여기서 침묵이란 사료의 부재다.
“여성들은 모든 표현 형태에서 거의 배제되었다. 과학이 그랬고, 역사는 좀더 그랬으며, 무엇보다 철학이 그랬다. 여성들은 공적 문서보관소의 선 반 위에서 거의 아무런 공간도 차지하지 못했다. 여성들의 기억은 오로지 부적, 반지, 옷 또는 다락이나 벽장 속에 감춰진 수백 가지 물건의 형태 로 보존돼 왔다.”
자료 보존에 대한 관념 자체가 흐릿한 우리 상황이 여성사 서술에 얼마나 불리한 여건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두번째 난관은 각 분야에 여성운동으로 달구어진 두터운 연구자 층이 없 는 것이다. <여성사>가 시대별, 분야별로 확고한 페미니즘 이론으로 무장 한 연구자들이 달라붙어 이룩해낸 쾌거인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이제 출 발점에 서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일본 여성학계가 일찌감치 이쪽 에 눈을 떠 세계 여성학계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을 생각하면 분발해 야 한다는 선의의 경쟁심이 솟는다.
임옥희(수원대·영문학), 고갑희(한신대·영문학), 태혜숙 교수(효성카톨 릭대·영문학)를 중심으로 한 ‘여성문화 이론 연구소’가 최근 문을 열 고 활동을 시작한 건 반가운 조짐이다. 이효재 전 이대 교수, 정현백 교 수(성균관대·사학), 조혜정 교수(연세대·사회학) 등 이 땅에 여성학의 씨를 뿌린 선배들과 박지향, 변기찬씨 등 유학파들이 힘을 모으면 우리 여성사 복원도 머지않아 기둥을 세우고 살을 붙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온다.
계간 <세계사상> 98년 봄호에 페미니즘 특집의 하나로 ‘타자의 정치학’ 이란 논문을 발표할 예정인 임옥희 교수는 이번 <여성사> 번역·출간이 뜻있는 작업이라며 반가워했다. 임교수는 “미국의 여성학 흐름을 좇아 담론으로만 치우치던 국내 여성학계가 현실의 구체적 사실에 뿌리를 둔 유럽 여성학의 전통을 확인함으로써 보다 밀도있고 균형잡힌 연구를 해나 가는 데 큰 자극이 될 것이라고”내다봤다.
정재숙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12월25일 제 188호